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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
2003-01-16

예술가의 ’인간적인’ 초상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세계는 폭력적인 부조리에 기초한다. 신작 <피아니스트>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얼마 안 있어 놀라우리만치 태연한 분위기에서 전쟁이 발발한다. 하지만 바르샤바의 한 라디오 방송국에서 쇼팽의 야상곡을 연주하는 중이던 블라디미르 스필먼(시사실에선 블라디슬라프 스필만으로 나감. 확인해주세요!)(에이드리언 브로디)은 통제실의 동요에도 별로 방해받지 않는 눈치다. 폭격음이 유리창을 때리지만 그는 그저 연주에 임할 따름이다. 그리고는 짚어나가는 한음 한음마다에 하나하나 환영을 깨뜨려간다.

스필먼의 자서전을 각색한 <피아니스트>는 최소한 작품 절반까지는 그럴듯한 영화의 경제학을 보여준다. 바르샤바는 단숨에 점령되고 음악가와 그의 중산층 가족은 나치의 선전을 전하는 도구로 포섭됐다가 다른 35만 유대인들과 함께, 바르샤바의 새 게토로 쫓겨난다. <피아니스트>는 지난해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평론가들의 반응은 시들했다. 대개는 별다른 감동을 받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친숙해서 뻔한 타입도 아니고 맥빠진 작품도 아니다. 무엇보다 폴란스키가 생생하게 형상화해낸 바르샤바 게토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강렬하다. 계급과 광기, 그리고 어린이들에 대한 묘사와 강조에서 특히 더 그렇다.

이런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게 마련인 대량추방과 (재판없는) 약식처형과 굶주림이 <피아니스트>에서도 스필버그적으로 묘사되었는가 그 어떤 영화감독도, 이런 소재의 영화를 만드는 데에 폴란스키보다 더 자격이 있을 수는 없다. 그의 불행한 어머니는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기차에서 불과 아홉살난 어린 아들을 밖으로 내던져버렸다. 고향인 크라코바로 돌아가면서 이 꼬마 소년은 좀도둑질로 연명했으며, 마침내 도착해서는 한 폴란드인 가족의 도움으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숨어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영화 전체가 폴란스키의 자전적 작품이라고 해석하기는 어렵다. 게토에서의 삶, 무너져가는 윤리와 양심, 그리고 기괴한 행정 등을 폴란스키의 기억대로 묘사하는 선에서만 자전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고통이 임계점에 접근하면서, 영화는 때로 사건들에 상당히 거리를 두고 묘사한다. 스필먼의 가족들은 창문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체포되는 장면들을 마치 극장구경이라도 하듯 내다본다. 독일군들이 노인을 휠체어에서 끌어내리고 친척들을 거리에서 쏴버린다. 스필먼을 포함한 수천명의 사람들이 게토의 중앙광장인 움슐라그플라츠로 쫓겨나 동쪽으로 추방당하는 사건도 스필먼의 느낌을 따라 조심스러이 그리고 담담하게 묘사됐다. 씩씩한 꼬마 소년(아마 폴란스키일지도 모른다)이 경악스러운(그리고 가치도 없는) 20즐로티를 주고 카라멜 한쪽을 구해온다. 가족의 마지막 행동은 그것을 여섯 조각으로 나누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그들이 우마차를 타고 사라짐에 따라 운명은 스필먼을 또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마치 무덤에서 그러는 양 그의 아버지는 손을 흔든다. 스필먼이 봉착하게 된 고독의 절대적인 급작스러움은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뒤쪽으로 진행하는 카메라를 따라가며, 폐기물로 가득한 거리에서, 시체들을 밟으며 휘청거리다가, 다 부서진 집으로 들어가면서, 스필먼이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갱스 오브 뉴욕>과 마찬가지로, <피아니스트>도 디테일에서 뛰어나다. 하지만 단점은 각각 반대다. <갱스 오브 뉴욕>이 너무 생략이 많다고 하면, <피아니스트>는 과도한 설명으로 얼룩진 느낌이다. 영화는 스필먼 가족의 추방과 게토생활에 엄청난 무게를 두지만, 후반부 절반은 또 다른 이야기로 메워진다. 폴란스키는 적어도 한 시간 정도는 덜덜 떨도록 해줘야 한다는 의무감이라도 느꼈던 것일까. 폴란드인 친구들에 의해 숨겨진 스필먼은 1943년 게토와 1944년 폴란드인들의 봉기를 자세히 목격하게 되며, 마침내는, 영화 처음과 마찬가지로 독일군의 화력이 불을 뿜으며, 그를 은신처로부터 끌어낸다. 이 수동적인 영웅은 주인공임과 동시에 증인이기도 하다. 거의 모든 신에 등장하는 에이드리언 브로디는 단정한 외모와 얇은 선이 그리는 우아함으로 영화를 이끈다. 그는 별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댄디스러울 정도의 멋쟁이다. 비록 블랙 마켓 카페에서 게토 엘리트들을 위해 연주하는 대목에서는 건반들에 묶여 있는 듯한 모습이며, 문명의 흔적이라곤 오로지 공포에 질린 그의 낯빛에서나 겨우 찾아볼 수 있을 지경이긴 하지만 말이다.

스필먼이 결국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움을 아끼지 않는 지인들과 흔치 않은 행운의 설명 불가능한 결합 덕분이었다. 적어도 한명의 폴란드인이 목숨을 걸고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그 어떤 유대인도 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 땅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다는 것을 폴란스키는 잘 알고 있다. 스필먼의 경우는 폴란드인들뿐 아니라 독일 장교 빌름 호센펠트의 도움도 받았다는 점에서 이례적일 따름이다. 전쟁 후반, 스필먼은 이젠 텅 빈 게토의 잔해로 돌아와 빈 집을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피클통조림을 움켜쥐고 서성인다. 인간으로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상태로 돌아다니다가 호젠펠트에게 발견되어 연주할 것을 명령받는다. 그 집에 마침 그랜드피아노가 있었다는 것은 초현실주의를 넘어서버린다. 그제서야 비로소 그는 인간의 모습을 다시 띠는 것이다. 짐 호버먼/ 영화평론가·<빌리지 보이스>

* (<빌리지 보이스> 2002.12.25. 짐 호버먼은 미국 영화평단에서 대안영화의 옹호자로 가장 명망이 높은 평론가로 <빌리지 보이스>에 기고하고 있습니다. <씨네21>과 <빌리지 보이스>는 기사교류 관계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