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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육과 감성,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 O.S.T
2003-01-18

성기완의 영화음악

피아노라는 악기는 근대 유럽문화의 정점을 가리킨다. 피아노의 전성기는 19세기이다. 하얗고 까만 건반은 서양음악의 음계가 닿은 최종 평균지점인 평균율의 각 음정들을 구현한다. 바이올린은 손가락으로 음정을 짚어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나 피아노는 사람의 손에 ‘앞서’ 선험적으로 체계화된 음정을 준비해놓고 있다. 피아노는 실제의 음높이 바로 그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평균 잡아놓은 이념적인 기준점이다. 그래서 피아노는 관념적인 악기이다. 이 악기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자신을 움직이지 않는다. 현악기나 관악기의 ‘떨림’은 언제라도 연주자의 감정이 손가락에 실리는 것을 받아들이지만 피아노는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피아노는 단지 ‘터치’의 차이만을 용인할 뿐, 그 울림은 객관적이고 일정하다. 보통 검은색으로 채색되어 있는, 연주회장에 저만치 놓여 있는 그랜드피아노의 자태는 과묵하고 고독하다.

피아노는 내면의 악기이다. 클라라에게 마음을 빼앗긴 슈만은 탈진할 때까지 몇 시간이고 피아노 앞에 앉아 즉흥곡을 연주하면서 거의 광증의 상태를 체험했다고 한다. 그의 열 손가락은 내면의 깊은 울림과 고독하고 관념적인 피아노/체계를 만나게 하는 열개의 열쇠이다. 이와 같은 만남은 유럽예술이 도달한 하나의 정점이다. 풍전등화와도 같은 조국의 현실을 여린 가슴으로 아파하면서 홀로 차가운 건반 위에 손가락을 놓는 창백한 쇼팽. 그의 멜로디는 투명한 유리판 위에 똑똑 떨어지는 핏방울처럼 맑고 처절하다. 폴란드 출신인 촌뜨기가 파리의 거만하고 위선적인 살롱에서 들려준 천재적인 멜로디들은 19세기 유럽인이 가지고 있던 감성의 가장 섬세한 부분을 자극했을 것이다.

이제, 로만 폴란스키는 2차대전/폴란드라는 특수한 시공을 설정하여 그 공간을 연주회장으로 삼는다. 그 살육의 아비규환 속에 피아노를 놓는다. 그 속에서 살아남은 피아니스트를 그 피아노 앞에 앉힌다. 피아니스트의 이름은 블라디슬로프 스필만. 2차대전을 뚫고 살아남은 이 유대계 폴란드인의 삶은 유럽 역사의 가장 슬픈 기억을 되새긴다. 이 피아니스트의 존재는 아울러 로만 폴란스키의 말대로 “음악의 힘, 삶에의 의지, 악에 맞서 분연히 서는 용기”를 증거하고 있다. 이 사람의 회고록을 보고서 로만 폴란스키는 “마침내 그토록 찾아왔던 이야기를 만났다”고 했다.

영화의 오리지널 스코어는 역시 폴란드 출신인 보이체크 킬라르가 지었다. 단조의 민요풍인 그의 음악은 어두운 시절에 대한 기억과 함께 폴란드적인 것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영화를 이끌어가는 음악은 역시 쇼팽의 음악이다. 죽음을 넘어 피아노 앞에 앉은 피아니스트는 쇼팽을 연주한다. O.S.T에는 쇼팽의 녹턴과 발라드, 그리고 왈츠, 서곡 등이 골고루 실려 있다. 야누스 올레니착이 피아노를 연주했다. O.S.T의 가장 특별한 곡은 마지막 트랙, 쇼팽의 마주르카 4번 A단조이다. 이 트랙은 영화의 실제 주인공 스필만의 오래된 모노 연주를 그대로 싣고 있다. 복잡하고 섬세한 온음 조바꿈이 자주 사용되는 이 곡은 쇼팽의 곡들 중에서도 가장 현대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곡의 하나로 꼽힌다. 그 특유의 여린 감수성이 표현된 멜로디와 복잡미묘한 화성은 쇼팽의 내면적인 고뇌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죽음을 이긴 피아니스트가 이 곡을 연주하며 다시 쇼팽과, 그리고 피아노라는 악기 자체와 대화한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