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사람들
타계한 <배틀 로얄> 감독 후카사쿠 긴지(深作欣二)
2003-01-22

의리 없는 세상을 떠나다

<의리없는 전쟁>에서는, 인생의 마지막 골목까지 몰린 자들이 폭력을 선택한다. 그들의 폭력은 처절하고 슬프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치졸하게 배신당하고, 한순간에 내동댕이쳐지면서도 타협하지 않는다. 그들은 <배틀 로얄>에서도 그렇게 싸운다. 어쩔 수 없는 싸움을 강요받으면서도, 결코 무릎꿇지 않는다. 후카사쿠 긴지의 마지막 싸움도 그랬을 것이다.

‘폭력의 달인’ 후카사쿠 긴지가 지난 1월12일 전립선암으로 사망했다. 후카사쿠 긴지는 지난해 가을 <배틀 로얄2>의 제작발표회에서 암을 앓고 있다고 고백했고, 암과 싸우면서 ‘더욱 불타오르며’ 영화를 찍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12월 <배틀 로얄2>의 크랭크인 얼마 뒤 병원에 입원했고 결국 유명을 달리했다. <배틀 로얄2>의 감독은 제작을 맡았던 장남 후카사쿠 겐타가 맡을 예정이다.

1930년에 태어난 후카사쿠 긴지는 일본영화의 산 증인이다. 후카사쿠 긴지는 40년, 조감독 생활까지 합한다면 50여년의 세월을 오로지 영화현장에서만 살아왔다. 구로사와 아키라나 오시마 나기사 같은 거장들과는 조금 다르게 후카사쿠 긴지는 메이저에서 상업영화를 만들면서 끊임없이 성공을 거두어왔다. 하워드 혹스나 존 포드처럼 스튜디오의 ‘규격’ 안에서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낸 거장인 것이다. 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지만 일본 영화계에서는 늘 최전선에 서 있었던, 언제나 관객의 호응을 받아온 행복한 감독이기도 하다. 대표작은 야쿠자의 항쟁을 실록풍으로 그린 <의리없는 전쟁> 시리즈. <의리없는 전쟁>의 리얼하고 격렬한 폭력 묘사는 일본만이 아니라 해외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일본에서 후카사쿠 긴지의 영향을 받은 감독으로는 ‘폭력’의 미학과 추악한 ‘사회’를 드러내는 기타노 다케시, 이시이 다카시, 하라다 마사토, 미이케 다카시 등을 꼽는다.

1930년에 태어나 53년 도에이영화사에 입사한 후카사쿠 긴지는 약 40편의 영화에서 조감독을 거친 뒤 61년 감독으로 승진하여 1961년 감독으로 승진한다. 영화사가 요구한 <후라이보 탐정> 2부작을 만들면서 연출을 시작한 후카사쿠 긴지는 사회파 액션으로 분류되는 <명예로운 도전> <쟈코만과 테츠> <늑대와 돼지와 인간> <협박> 등을 만들며 액션영화에서 탁월한 재능을 선보인다. 특히 폭력을 생존수단으로 삼게 된 하층민들이 강렬하게 터뜨리는 폭력의 분출을 역동적으로 묘사하는 액션장면에서 고유한 시각적 스타일을 만들어간다. 신도 가네토가 시나리오를 썼고,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한 <펄럭이는 군기>는 초기 후카사쿠 긴지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도에이가 히트를 예감하고 시리즈화를 결정한 <의리없는 전쟁>의 연출을 맡은 후카사쿠 긴지는 남자들의 멋진 세계가 아니라, 모책과 배신이 넘치는 피의 항쟁을 다큐멘터리 스타일로 그려내며 절찬을 받는다. 60년대 사회파 액션영화를 통하여 폭력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청춘을 전후의 사회상과 연관지으며 그려왔던 후카사쿠 긴지의 영화세계는 <의리없는 전쟁>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잦은 핸드헬드와 극단적인 앵글을 활용한 박력넘치는 영상, 정지화면과 문자의 사용 등은 후카사쿠 영화의 스타일을 완성했다. 후카사쿠 긴지는 네오 리얼리즘과 누벨바그 등 선구적인 영화운동의 성과들을 나름대로 받아들이면서 야쿠자물이라는 일본영화 특유의 장르영화 속에서도 고유한 스타일을 만들어낸 것이다. <의리없는 전쟁> 시리즈 이후 <마계전생> <부활의 날> 등 장르영화로 돌아갔던 후카사쿠 긴지는 82년 <키네마순보> 베스트 원, 일본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인정희극 <가마타행진곡>으로 절찬을 받는다. <가타쿠의 사람> <쥬신구라 외전 요쓰야 괴담> <오모챠> 등으로 선전하던 후카사쿠 긴지는 마침내 2001년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만든 <배틀 로얄>로 선굵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후카사쿠 긴지는 고독한 작가주의영화를 만들어온 감독이 아니다. 늘 관객을 생각하며, 그들이 원하는 영화를 만들어온 ‘상업적’인 감독이다. 하지만 단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후카사쿠 긴지의 영화에는 언제나 관객이 이해할 수 있는 ‘실험’이 담겨 있었다. 어떤 추악한 것들과 싸우면서도, 결코 굴복하거나 타협하지도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곧게 걸어온 것이다. 감독들의 ‘배틀 로얄’에서 최후까지 살아남아 만신전으로 향할 자는 역시 후카사쿠 긴지인 것이다.김봉석/ 영화평론가 lotusi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