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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로 이야기> 각색한 대만 드라마 <빈궁귀공자>
2003-01-22

내가 만화로 보이나요?

대만 드라마 <빈궁귀공자>는 말 그대로 ‘빈궁’한 ‘귀공자’ 이야기다. 너무너무 잘 빠지고 공부도 잘하는데다 생긴 것까지 멋진 타이랑. 모두 타이랑이 부잣집 도련님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사실 타이랑에게는 집나간 아버지, 돈을 모으기는커녕 쓸 줄만 아는 어머니, 그리고 줄줄이 동생이 여섯이나 달려 있다. 타이랑은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동전 떨어지는 소리에 0.01초만에 반응하기,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도 장학금 타기, 쉰 음식 소화하기, 돈냄새 100리 밖에서 맡기 등 온갖 초감각 재능을 키우고 이를 활용해 집식구들을 먹여살리고 있었으니…!

<빈궁귀공자>는 일본 만화 <타로 이야기>의 각색작품이다. 만화를 충실히 따르자는 모토 아래, 만화 <타로 이야기>가 지닌 엽기발랄함을 그대로 드라마 안에 표현해낸다. <빈궁귀공자>를 이야기하려면 워낙에 원작이 재미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한다. <타로 이야기>의 대표적인 미덕은, 가난을 희화화한다기보다 너무 찢어지게 가난해서 가난이 창피하다고 인식할 여유조차 없는 상황으로 만들어 버리는 점에 있다. 가난에 대해 감상적 차원을 허락하지 않기에 타로(타이랑)의 귀공자 이미지와 실제의 극단적인 차이가 웃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적인 요소로 넘어가면 <빈궁귀공자>는 <타로 이야기>에 비해 달리는 것이 많다. 재미있는 요소는 99%가 만화 원작에서 나온 것이다. 게다가 배우들의 연기도 만화의 극단성을 살리기엔 처져도 한참 처진다. <꽃보다 남자/유성화원>에서 레이 역으로 나온 주유민 특유의 ‘멍한 연기’가 전편에서 빛이 난다(?). <꽃보다 남자>의 F4, 꽃미남 4인방의 부잣집 도련님이 가난뱅이 총각으로 나온다는 발상 자체가 주유민 팬들에게야 서비스겠지만, <빈궁귀공자>의 드라마적 빈궁함은 우리나라 드라마와 경쟁해도 손색이 없다.

‘리액션’이라는 말은 구경도 못 해본 듯한 주유민의 어설픈 연기, 주유민과 경쟁이라도 하듯 ‘쟤 대사가 끝나야 내가 대사를 할 텐데’ 하고 기다리는 조연들의 얼굴 표정은 이런 드라마를 만든 제작진과 이에 돈을 투자하는 방송사와 이를 수입한 방송사의 마인드를 한순간 의심케 한다. 드라마 중간에 표나게 지나가면서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구경꾼들은 누벨바그가 사실 이런 경험이 아니었는가, 하는 타임슬립을 경험케 해준다. 드라마적 발상이 극도로 부족하다는 것은 심심찮게 드러난다. 마치 우리나라 드라마 중간에 ‘장소협찬 한국민속촌’이라고 자막을 띄워 드라마 몰입을 방해하듯이(<빈궁귀공자>만 그러는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드라마 중간에 ‘아무개 우정출연’이라고 자막까지 띄우는 돌발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기실 주유민보다 두드러지는 배우는 타이랑을 본의 아니게 ‘짝사랑’하게 된 산푸 역의 유경굉이다. 경쟁자로 타이랑을 따라다니다가 그만 ‘용서받지 못할 사랑’을 시작하게 된 산푸의 좌충우돌은 인물 중에서는 유일하게 만화적인 슬랩스틱 연기를 보여주려 한다. 주유민 못지않게 멍한 연기의 달인()이지만, 유경굉은 묘하게도 멍한 표정 안에서 ‘비극의 사랑’으로도 모자라 매회 ‘솥뚜껑보고 놀라기’로 천당과 지옥을 종횡무진 날뛰는 산푸에게 유일하게 살아 있는 만화적 인물화를 부여한다.

모든 것을 제치고 <빈궁귀공자>에서 가장 ‘약진’하는 요소는 연출이다. 완성도는 다 내던지고 드라마는 만화적인 부분에 집중공략을 한다. 빨개지는 얼굴, 툭하면 날아다니는 천사, 타이랑을 둘러싸고 드러나는 광휘, 러브러브 모드를 구사하는 하트, 잊어버릴 만하면 등장하는 하늘의 목소리(마치 만화 여백에 만화가가 전지자적 입장에서 한마디 남기는 것을 연상시킨다) 등 드라마 자체가 만화적인 문법을 빌려 온갖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어놓는다. 어머니의 임신소식에 한순간 타이랑 눈앞에 여섯 쌍둥이가 보이는 장면. 여섯 쌍둥이에 동생들의 얼굴을 ‘붙여놓은’ 장면에서 연출가의 손길이 찡했다. 단지 만화를 모사하는 것이 아니구나 싶어서.

반짝반짝 빛나는 특수효과(?)의 미덕은 다른 부실함을 모두 젖혀버리고 연출의 의욕은(만) 높이 사도록 만들어버린다. 만화를 원작으로 할 때, 만화적인 요소를 버리고 TV 드라마 스타일로 바꿔내느냐 아니면 아예 만화적인 스타일 자체로 밀고 나가느냐 <빈궁귀공자>는 후자를 선택했고, 드라마화하다가는 사뭇 감상적이 되어 죽도 밥도 안 될 상황을(타이랑의 상황은 비참 그 자체이다), 단순하고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엽기성 혹은 발랄함으로 즐겁게 포장한 셈이다. 그 솜씨는 어설프지만 그래도, 일단은 <빈궁귀공자> 하나만으로 놓았을 때는 즐길 만하다. 물론 이런 작품이 이후 줄줄이 타이랑 동생 딸리듯 나타나면 재고가치가 없는 드라마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지만.남명희/ 자유기고가 zoo@zootv.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