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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망과 실천
2003-01-22

성석제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이 이야기의 두 주인공의 이름이나 직업은 밝힐 수 없다. 하여튼 한 사람은 우리 사회에서 꽤나 알아주는 명망가이고 또 한 사람은 역시 꽤나 알아주는 실천가이다. 줄여서 ‘명’, ‘실’로 부르기로 하자.

십수년 전의 일이다. 실은 자신이 관여하는 어느 단체의 일로 도움을 받기 위해 명을 찾았다. 명은 자신과 정치적인 견해가 전혀 다른 그 단체를 위해 적지 않은 금액이 든 봉투를 내놓았다. 그 단체가 피아를 가리지 않고 도움을 받으러 다닐 정도로 사정이 다급했음은 불문가지이며 그 단체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해온 실이 명에 감격한 것 또한 당연하다. 우리 사회의 전통에 따르면 이런 경우 백이면 백 술자리로 이어져서 흉금을 터놓는 대화를 통해 이제까지 각자가 가지고 있던 선입관을 해소하고 다정한 새 인연을 맺게 된다. 그들 역시 그렇게 했다. 명의 단골 술집을 찾아 조용한 방에 앉은 그들은 늦게야 알게 된 것을 아쉬워하며 연신 술잔을 부딪치며 건배를 외쳤다. 순배가 거듭되면서 두 사람의 혀가 꼬부라지기 시작했다. 이거야 어느 사회, 어느 사람에게나 나타나는 일이다. 그런데 명에게는 자부심과 함께 어떤 자격지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실에게, 요즘 세상이 자신을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특히 실이 속해 있는 세상의 반(그가 믿는 바대로라면 진보진영)에서 뭐라고 하느냐고 물었다. 실은 기왕에 큰 도움도 받았겠다, 아름다운 술자리의 흥취를 깨기 싫어 그냥 ‘아무 말 안 하고 있다’고 적당히 대답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술잔이 깨져라 하고 부딪친 뒤 잔을 비웠다. 두번, 세번, 혹은 더. 그러고나서 명은 다시, 온 세상이 자신을 질시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겠느냐고 물었다. 이번에는 혀가 많이 꼬부라져서 존댓말을 하는 것을 잊은 듯했다. 실은 역시 같은 수준으로 꼬부라진 혀로 ‘당신은 혼자 잘 먹고 잘살면 된다, 뭐가 걱정이냐’고 대꾸해주었는데 혀가 같이 꼬부라졌으니 당연히 반말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잔을 부딪쳤다. 세번, 네번, 다섯번. 이윽고 명은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욕설을 퍼부으면서 세상이 왜 자신을 나무에 올려놓고 흔들어대는지 아느냐, 혹시 네가 그중 행동대장이 아니냐고 말했다. 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축적된 경험에서 우러나온 욕설을 앞세워, ‘세상이 네게 아무 관심도 없는데 넌 뭐가 불만이냐’고 고함을 질렀다. 그의 고함이 훨씬 더 컸고 그의 욕설이 훨씬 다채롭고 심도가 깊었던 건 당연하다. 그리하여 명이 술값을 내는 그 술자리는 끝이 났다. 다음날 아침 명은 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가 어제 과음을 했던 모양입니다. 혹시 큰 실수를 하지는 않았습니까.” 실은 잠에서 덜 깨기는 했을망정 마찬가지로 정중하게 아무 일도 없었노라고, 사실 자신도 잘 기억하지 못하노라고 대답해주었다. 그 다음에도 비슷한 일이 몇번이고 되풀이되었다. 이윽고 세월이 흘러 단체와 실이 더이상 명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고 명 역시 어떤 패턴을 깨닫게 되었던지 그들끼리의 아름다운 만남은 끝이 났다고 한다.

실이 말한 바 명에게는 한 가지 장점이 있다.

“그 사람은 자기한테 불리한 일은 절대 기억 안 해. 못해. 그게 그 사람을 지금 그 자리에 있게 만들었다고 봐. 요새 와서 자꾸 뒤를 돌아보려고 하는 것 같은데 지금 자신이 정상에 오른 게 자기 노력과 실력 덕분이 아니라 성향 덕분이었다는 걸 알게 되어서일 거야.”

실천가의 말이 맞을 것이다.

반성이 없는 지식은 언제나 독선을 초래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독선과 허명으로만 끝나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게 자리를 떡 차지하고 물러날 줄 모르기 때문에(인구밀도가 세계 3위인 이 나라에서!) 새로운 사람이, 겸손함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우리 사회 지식인들의 명실(名實)이 완전히 부합하는 날은 언제가 될까. 성석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