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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명] 직업의 생리
2003-01-22

지난 1년 반 동안 이곳에 글을 썼다. 공동필자인 조종국 대표가 한번 써보라고 했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별 망설임 없이 ‘그러마’라고 했다. 그 ‘그러마’가 씨가 되어, 내 생애 처음으로 한 매체에 꽤 오랫동안 글을 쓰는 처지가 되었다. 2주에 한번씩 찾아오는 마감일은, 만화가 정훈이가 이미 공표해버린 ‘마감의 비밀’을 알고부터 수요일에서 목요일, 심지어 금요일 밤으로까지 늘어졌다.

미안하게도 원고 펑크도 두번이나 냈다.

한번은 전북 임실의 산 속에서 있었던 <YMCA야구단> 촬영을 핑계로, 한번은 기자와의 대화 부족으로 동남아시아 어느 오지에서 뻔뻔하게 금요일 점심에 보냈는데, 그 주만 유독 마감이 목요일이어서 실리질 못했다.

어쨌든 ‘악질필자’인 셈이다. 그동안 원고를 쓰면서 느꼈던 건 ‘직업의 생리’라는 거였다.

나는 어느새 영화제작 시스템과 그 일정에 익숙해져버린 사람이란 거다. 이를테면 시나리오 개발기간 1년, 촬영 준비기간 3∼4개월, 촬영기간 3개월, 후반작업 3개월 등의 평균적 스케줄과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어 내 삶의 형태와 속도는 1년형, 아니면 2년형에 맞춰져 있었다는 걸 원고를 쓰면서 새삼 느꼈다.

사실 하루 24시간의 일정과 내용도 크게 보면 영화 한편의 출발부터 완성까지라는 대전제하에 이루어져왔다. 감독, 작가나 현장 스탭과는 달리, 매일 회사에 출근하고 회사업무를 봐야 하긴 하지만.그러다보니 지난 10년은, 곧 약 13편의 영화를 제작한 것으로 단순요약할 수 있겠다.

이를테면 ‘10년 세월’이 ‘영화 10편 제작’으로 쉽게 계산되는 것이다. 그런데 원고마감을 기준으로 한 ‘2주형 인생’은 내게 낯설고 벅찼다. 무얼 쓸까에 대한 치밀한 고민은 엿바꿔먹고 언제나 벼락치기로 마감에 쫓겨 생각을 정리하고 얼렁뚱땅 수준으로 원고를 보냈다. 마음엔 ‘밀도를 가지리!’라고 주먹 불끈 쥐어보지만 또 2주 뒤엔 말짱 꽝이다. 그런 식이었다.

이제 충무로 다이어리를 마치면서 참으로 평범한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너, 글은 왜 쓰니’라고 누가 묻는다면 딱히 할말이 없다. 쓰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알량한 글솜씨를 보여주고 싶어서, 영화업계에 제대로 된 소리를 내고 싶어서, 뭐 이런 답들이 떠오르지만 사실 똑 떨어지는 답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근사치에 가까운 건, ‘쓰라니까!’다. 참으로 한심하지만 솔직한 이유가 아닐 수 없다.

누가 내게 ‘너, 왜 영화 만드니’라고 물으면 대답할 거리가 꽤 된다.

그래서… 이유없는 그 어떠한 행위는 되도록 삼가야, 심신의 안녕이 이루어지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1년 반이 지나서야 했다. 물론, 거절 못하는 약한 성격에, 매체의 영향력에 미리 주눅들고 눈치보는 소심증으로 가끔 글을 쓸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쓰라니까’라고 변명하면서 여기 쓰고 저기 쓰는 짓거리는 그만해야 할 듯싶다.

참으로 별 반응없는 원고를 1년 반 썼던 이 필자, 독자들께 그래도 마지막 인사를 ‘꾸벅’ 드린다. 이메일로, 변비를 고친 약이 무엇인지 물어온 몇몇 분들(이 글이 가장 호응이 좋았다. 이상한 쪽으로), 문법도 맞지 않는 글이라고 게시판에 글을 올렸던 분, 자유기고가도 아니면서 이제 그만 쓰라고 책하셨던 분, 그리고 내 글을 보고 이것저것 물어보시거나 안부를 주셨던 분들에게도 인사드린다. 나의 충무로 다이어리는 이걸로 끝이지만, 아직 대답할 거리가 꽤 많은 나의 ‘영화 만들기’는 쭈욱 계속될 것이다.

모두 행복하시길….심재명/ 명필름 대표 shim@myungfil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