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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무사히로의 <치킨>
2003-01-23

겁쟁이의 철학

치킨(chicken, 겁쟁이)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있다. 그것은 골목길이나 학교 뒷마당에서 들어도 치욕스러운 호칭이다. 하물며 명색이 세계 타이틀을 건 권투 시합장에서 수천 관중으로부터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보라. 한두 번도 아니다. 그는 이미 수차례의 방어전에 성공한 세계 챔피언이지만 자국 일본에서는 팬들의 냉대 때문에 경기를 포기하고 타이, 미얀마, 인도 등을 떠돌아다니며 적지에서 경기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더욱 신기한 것은 이 남자, 내가 왜 이런 욕을 들어가며 경기를 해야 하냐고 항변은 하지만, 사실은 크게 벌린 입을 이죽거리며 자기에게 쏟아지는 온갖 비난을 씹어버린다. 그는 잘 알고 있다. 팬들이 왜 자신을 욕하는지. 상대를 죽음 직전으로 몰고 가는 난투의 쾌락을 포기한 권투가 어떤 모습인지. 그러나 그의 전략은 변함없다. 완벽한 방어.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원시의 스포츠를 일발의 유효타도 허용하지 않는 철저한 디펜스의 게임으로 만들어간다.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이유는 서서히 밝혀진다.

수비의 천재, KO를 피한다

권투 선수인 죠우시마는 아마추어 시절, 시합이 종료된 이후에 이성을 잃고 상대를 무차별 가격하여 그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어버린다. 그 죄로 1년간 복역하게 되고 당연히 권투를 그만두려고 생각하지만, 어떤 계기로 다시 링 위에 선다. 그리고 이제는 180도 바뀐 모습. 상대의 공격을 요리조리 피해다니는 아웃 복서 정도가 아니라, 상대의 완벽한 허점을 찾아도 절대 그를 가격하지 않고 도망만 다니는 디펜스의 극단을 추구한다. 무승부를 허용하지 않는 현대 복싱의 룰 때문에 심판들은 매 회 두 선수의 우열을 가려야 하고, 상대의 가격을 한 대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솜방망이 유효타를 적당히 때린 죠우시마가 당연히 판정승을 거두게 된다.

두말 할 것 없이 관객의 입장에서는 가장 재미없는 시합이다. 최대한의 극단적 설정과 엎치락뒤치락의 역전으로 충격적인 게임의 시나리오를 만들어야 할 스포츠만화의 룰로 보아서도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착상이다. 그러나 그 역전의 만화, 무라카미 무사히로의 <치킨>(세주문화 펴냄)의 전략은 오히려 노골적이다. 만화가와 독자 모두 권투란 <허리케인 조>처럼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야만의 게임임을 안다. 그런 만화의 주인공은 가능한 한 많이 두들겨맞고 KO 직전까지 다운되면서도 필사의 일격으로 상대를 쓰러뜨려야 한다. 핵심은 공격력, 남자는 주먹이다. <치킨> 역시 권투란 라이벌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버리는 난투의 게임을 먼저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을 다음 순간 뒤집어 수비의 천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자연스레 두 가지 승부가 도출된다. 첫 번째, 과연 수비의 천재가 챔피언이 될 수 있을까 두 번째, 과연 그 게임이 재미있을까 첫 번째 문제는 과감한 생략으로 ‘설정’해버린다. 그리고 두 번째 핵심적인 문제로 도전을 걸어온다. 언제나 큰 입으로 시시덕거리는 징그러운 주인공이 악마의 미소를 띤 채 우리의 주먹을 피하고 또 피한다. 해설자는 즐겨 소리친다. “나왔다. 신기에 가까운 디펜스!!!”

일단 그 장면들이 우리를 숨막히게 만드는 건 사실이다. 두 선수의 필사적인 몸놀림 자체가 지면의 여백을 용납하지 않는데다가, 그 사이사이로 맹렬한 동선들이 고무찰흙처럼 메워 들어간다. 경기의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선수들도 독자들도 호흡곤란으로 허덕거린다. 그것은 숨가쁜 랠리의 테니스나 탁구를 연상케 한다. 가끔씩 필사의 펀치라도 있었으면 좋겠지만, 도전자의 주먹은 무시무시한 속도의 몸놀림에 간발의 차이로 접근해 들어가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 앞에 <데빌맨> <베르세르크>에서 익히 보았던 큰 사각의 눈, 귀밑까지 찢어진 입의 주인공이 악마의 목소리로 속삭인다. “강해지거라, 더 빨리 공격해오라구. 더 심플하게, 더 단순하게, 쓸데없는 모션을 배제하고, 최단거리로 펀치를 날려. 한계까지 따라오는 거야. 너의 신체를. 나의 신체를. 일상생활에서는 결코 사용할 일이 없는 인간의 잠재능력. 근력 50%, 신경 70%, 심리적 한계를 넘은 생리적 한계의 세계로.”

어설픈 카이지, 그러나 끌린다

이 만화는 겉보기에는 <데빌맨>이나 <베르세르크>의 악마적 유희와 선악 불명의 테마를 보여주는 듯하나, 사실은 <도박묵시록 카이지>식의 단순한 철학에 기반해 있는 게 아닐까? 링 위의 싸움과 끊임없이 겹쳐지는 주인공의 회고식 사변, 철학적 깨달음을 먼저 얻은 자의 교만한 설교, 자각없는 인간들의 평온한 일상의 장면들과의 병치…. 그러나 그 의도는 회고장면의 ‘과도한 감동’과 상당히 어긋나 보인다. 주인공으로 하여금 링에 다시 서게 하는 모녀는 구체적인 설득력이 없다. 결국 철저한 수비 게임의 극단에서 오는 철학적 희열이라는 만화의 핵심이 주인공의 (별로 설득력 없는) 인간적 면모로 인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어설픈 카이지, 어설픈 데빌맨이지만 그 경기장면은 꽤나 혼을 빼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좀더 지켜보고 싶다.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 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