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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아 수필집 <누구나의 가슴에도 빙하는 흐른다>
2003-01-23

세상을 건너는 다리

나는 문학을 ‘땜통’으로 시작했다. 시는 김상진 장례식 때 미리 정했던 유명 대학생 ‘문인’이 사양을 하는 바람에 ‘사건 전날’ 취생몽사 중 쓰고 호된 데뷔 신고식을 치렀고, 산문은 한 계간지의 시집 서평 원고를 ‘원로’ 신경림(시인)이 2개월, 그리고 ‘중견’ 정희성이 3주를 써먹고 마감 일주일이 남은 시점에 황급히, 문단 (‘신예’는 아니고) 신참이었던 내게 숙제처럼, 아니 명령조로 떠맡겨졌던 글이 첫 작품이다. 문학이, 글쓰기가 운명이라고 자못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때마다 ‘땜통은 나의 글쓰기의 운명’이라고 속생각할 정도로 그런 처지는 계속 이어졌다. 소설은 유일한 예외지만 그래서 그런지 문학하는 친구들은 나를 소설가로는 특히 별로라고 여기는 눈치다.

어쨌거나,그런 운명의 시련()을 견디는 와중에 나는 수필이 정말 대단한 문학 장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수필이야말로 뭔가 문학을 ‘땜통’하는 듯하면서도 결국은 문학 전체에 내용-미학적 총체를 부여하고 급기야는 총체 자체를 미학화하는 궁극의 장르 아닌가….

지난 세기 말 한 잡지의 편집을 잠깐 맡으면서 박완서(소설가)-신경림-김윤식(평론가)-김병익(평론가)의 산문을 집중 4회 연재한 적이 있는데, 그때 ‘산문=수필’은 시간의 낭떠러지를 건너는 ‘늙음=아름다움’의 다리였고, 그때 수필은 문학의 위기, 아니 ‘진지함의 위기’를 극복하는 구원의 장르였다.

오늘날 한국에 수필가는 무수히 많다. 그(녀)들은, 원고 청탁도 없이, 그러니까 땜통의 기회도 없이, 그냥 글을 쓰고 책을 낸다. 그 숱한 책들 중 많은 부분이 총체를 능가하는 땜통의 미학보다는 종이가 아까울 정도의 낙서 혹은 일기에 가깝다는 점이 나를 무겁게 짓누를 때 나는 주연아의 글을 만나고 모종의 희망을 느꼈었다.주연아의 첫 수필집 <시보다 짧고 사랑보다 긴>에 실린 글들은 여러 문단 원로들을 ‘수필의 젊음’으로 찬탄케 했고, 상당 기간 베스트셀러에도 올랐다. 6년 만에 나온 위 책은 자기보다 나이 어린 집안 식구의 죽음을 머금고, 문체가 ‘나이의 아름다움’을 뿜는다. 그것은, 여전히 ‘한국적 수필풍’보다 젊지만, 예술 속으로, 총체 미학 속으로 나이를 먹은 아름다움이다.

가령, 표제작의 이런 귀절. “누구나 가슴속엔 녹지 않는 빙하가 있다. 그리고 그 위에 떠 있는 크고 작은 빙산들…. 그의 아픔을 보듬고 싶지만 두개의 육안밖에 없는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나에게 천개의 눈이 있다면…. 그 빙하가 나의 눈에서 그의 눈으로, 그의 가슴에서 나의 가슴으로 흐르게 할 수도 있을 텐데….”김정환/ 시인·소설가 maydapoe@thrun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