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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방법 혹은 태도에 관한 `진보적` 영화 <마들렌>
2003-01-27

사랑의 진정성은 솔직함에 있다

“사랑을 보여줄까”라는 카피의 멜로영화가 개봉되었다. ‘어떤 사랑’이 아니라 ‘그냥 사랑’을 보여준다니, 사랑의 일반론이라도 개진해보겠다는 겐가 그랬다. 영화는 특이한 에피소드에 의존하지 않고, ‘사랑 일반’에 관한 담론을 개진한다.

‘문제적 사랑’이라고 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불륜, 동성애, 미성년자와의 사랑, 근친상간 등등. 그러나 이는 모두 ‘누구를 사랑하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대상에 관한 금기를 다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고찰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데, 상담심리학 등에서 이런 문제들이 다루어진다. 영화는 사랑에 관한 심리학적 고찰을 많이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흔적들도 보여준다. 캠퍼스의 플래카드에 하필 “커플 상담을 통해 이성교제의 문제를 해결해드립니다”라고 쓰여 있고, “과잉일반화의 오류”라는(본래는 논리학 용어이나 상담심리학에서 ‘사고왜곡’의 대표적 예로 더 많이 쓰는) 전문용어가 여러 번 나온다. 억지라고(내 칼럼은~ 춘향전이야. 억지 춘향이지!) 심리학에서는 사랑을 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것으로 자긍심을 꼽는다. 자긍심은 자신을 긍정하는 힘으로 자만심과는 다르다. 자긍심을 바탕으로 자신의 욕망과 약점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용기야말로 사랑을 하는 데 가장 필요한 덕목으로 본다. 실연에 대해 씩씩하고 유연한 자세를 갖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긍정적인, 너무나 긍정적인

영화는 한달간의 계약연애를 통해 “사랑의 진정성은 영원함이나 유일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솔직함에 있다”는 것을 강변한다. 또한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통해 바람직한 사랑의 태도와 성, 임신/출산에 관한 진일보된 견해를 보여준다. 아울러 관념이 아닌 구체, 과거가 아닌 미래가 중요하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카르페디엠!

한달만 사귀되, 100% 솔직해야 된다는 계약은 ‘사랑이란 참여자의 솔직한 태도가 관건인 한시적 계약관계’라는 애정관을 보여준다. 그게 아니라면 성혜가 나타났을 때 이건 단지 한달간의 계약연애일 뿐, 진짜 사귀는 것은 아니라고 발뺌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극중 누구도 ‘한시적 계약연애’와 ‘(영원한) 진짜 연애’를 구분하지 않는다. 사랑의 진정성은 영원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또한 신민아는 성혜에게 질투를 느끼지만, 그가 품었던 연정자체에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애인이 없다고 말”하고 감정의 추이를 솔직하게 말하지 않은 것에 화를 내며, 나중에 털어놓자 괜찮다고 한다.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굳이 말한 것도 솔직해야 한다는 원칙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나 그 솔직함은 그에게 벅차다. 그러나 애인의 처녀성 때문이 아니라, 거짓된 태도 때문에 헤어졌으며, “결정적인 순간에 솔직했던 것은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친구의 역설은 그로 하여금 ‘솔직함이 성경험이나 임신 사실보다 훨씬 본원적’ 임을 “버스 떠나기 전에” 깨닫도록 한다. 사랑의 진정성을 가르는 기준은 과거나 현재의 ‘다른 상대 유무/성관계 유무’ 따위가 아니라 바로 관계 안에서 서로가 얼마나 솔직한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미술관 옆 동물원> <엽기적인 그녀>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 등에는 깔끔하고 얌전한 기존 여성상에서 벗어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녀들의 사랑에 관한 태도는 여전히 진부한데, 심은하는 짝사랑을 하고 있었고, 전지현은 옛사랑을 못 잊고 있었으며, 신은경은 둘 다였다. 그녀들은 사랑에 있어 자폐적/고착적이었지만 그녀들을 좋아하게 된 남자에 의해 요행히 사랑을 얻는다. 그러나 신민아는 다르다. 그녀는 자긍심이 높고, 솔직하고 용기 있으며, 지난 사랑 따위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또한 그녀는 소외되지 않은 성의식을 가지고 있다. “사랑하니까 섹스한다”이다. 많은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섹스보다는 로맨틱한 관계를 선호하는 것(<미술관 옆 동물원> <그대안의 블루>)으로 그려지거나, 사랑과 분리된 섹스를 지나치게 추구하는 것(<너에게 나를 보낸다> <처녀들의 저녁식사>의 강수연)으로 그려졌던 것에 비하면, 신민아야말로 “여자답기보다는 나답게” 사는 멋진 여자이다.

그녀는 직전에 연애를 하다가 채였지만, ‘과잉일반화의 오류’에 빠져 자기비하를 일삼지 않고, 그에 대한 미련도 없다. 그녀는 먼저 자신을 알리고 연락처를 남기고 데이트를 청한다. 나아가 “우리 사귀자, 너 나 싫어” 하고 과감하게 제안한다. 또 “너 정말 나를 사랑하는구나”, “한달 뒤면 너는 나를 사랑하게 될 것” 같은 ‘자기이행적 예언’을 한다. 거리낌없이 집에 데려와 섹스에 관해 떠보고, “너 너무 귀엽다”, “너무 해피했어”, “항상 오늘이 기억날 것 같아” 같은 긍정적 멘트를 날리고 뽀뽀해준다. 범생이인 그를 “조금 손보”기 위해 따가운 ‘첫 경험’을 시켜주고, 게임을 가르친다. 알바 현장에 나타나 ‘새벽 산책에 동참’하고, 그가 좋아하는 비를 같이 맞는다. 그녀는 차츰 (산성)비 맞는 것도 즐기고, 그가 권한 책을 읽으면서, 그에게 기꺼이 동화된다(그녀는 그 책을 소장한다. 사진이 들어 있던 책은 같은 책의 양장본이다) . ‘사랑은 길들이기’라고, 그녀는 그를 길들이며, 자신을 길들인다. 진정한 선수다!

조인성은 다소 관념적이지만, 책을 통한 간접경험 등으로 균형잡히고 개방된 가치관을 가졌다. 사실 그로서는 불과 몇달 동안 감당하기 힘든 변화를 겪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관념을 고집하지 않고, 상황을 진중하게 받아들이며 사려깊게 행동한다. 그는 다시 큰 마들렌을 보고, 친구의 말을 통해 솔직함의 본원적 가치를 깨닫고, “내 인생의 1쿼터가 끝날 무렵 그녀가 찾아온 것”, 즉 회고적/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녀 삶의 2쿼터가 시작될 무렵 내가 그녀를 찾아간 것” 즉 미래지향적/능동적으로 인식을 전환하여 그녀에게 “질리지도 않고, 언제든 볼 수도, 안 볼 수도 있는 하늘”이 되기로 한다. 물론 그 과정이 아주 치밀하게 그려져 있지는 못하다. 어쩌면 훗날 미처 소화되지 못한 감정의 잔여물들로 인해 그가 다시 혼란을 겪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이 연애를 통해 훨씬 커지는 자아를 경험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임신도 출산도 전진 앞으로!

영화는 또 한명의 쿨한 여성을 보여준다. 성혜는 수줍던 티를 벗고, 먼저 연락하여 그를 만나 자신의 마음을 보인다. 그러나 역에서 지석과 희진이 같이 있는 것을 보고 “니네 사귀냐” 한마디로 그 관계를 인정하고, 마음을 턴다. 열차에서 그녀가 전공분야(그녀는 아이디도 ‘로드무비’이다)에 대해 떠드는, 일종의 ‘지적/문화적 폭력’을 행사하여 신민아가 소외감을 느끼자 커플 사진을 찍어준다. 공연에 온 그에게 “그럴수록 더 그녀에게 있어야지… 친구로 와준 네가 더 반갑다”라고 말한다. 진짜 쿨하다.

영화/드라마에서 여자들은 막연하게 사랑을 믿으며 임신했다가, 냉담한 남자의 태도를 확인하고 낙태하거나(<색즉시공>), 끝까지 잊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아이를 낳는다(드라마 <젊은이의 양지>). 그에겐 눈곱만치 미련이 없으면서 아이를 낳으려는 그녀는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의 채시라 이후 처음인 것 같다(<처녀들의 저녁식사>의 김여진은 임신이 목적이었고, 사랑은 없었다). 그녀는 솔직하고자 임신 사실을 현재의 애인에게 알리긴 했어도 기댈 마음은 없었다. “성혜도 너 좋아했었대”라고 말하는 그녀는 이미 그를 보내는 심경이었다. 같이 병원에 가자는 그를 따돌리고 혼자 병원에 갔고, 아이를 낳겠다고 마음먹은 뒤에는 그를 피했다. 또 계약이 끝나고 고백하려는 그를 애를 낳을 거라며 저지한다. 그녀는 임신/출산의 문제에 솔직하면서도 준호나 그에게 기대지 않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녀가 낳겠다고 마음을 굳히는 데는 (카메라가 그녀의 시선으로 엄마의 옆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것으로 보아) 자신의 박복함을 비관하지 않고 “암만 해도 써드를 만들어야겠어”라며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긍정하며 낙천적으로 사는 엄마와의 동류의식이 용기로 작용한 듯하다. 그녀는 실수로 아이를 가졌지만 그런 자신까지 받아들인다. 이미 경제적으로 자립한 그녀는 사실 아이를 기를 능력이 있다. 비록 그녀의 기특한 결심은 무산되고 말지만(초산부, 특히 미혼녀의 자연유산율은 꽤 높아서 그리 인위적인 설정은 아니다), 그것에 대해서도 심하게 자책하지 않고, 툴툴 털고 일어난다.

아, 그녀처럼 살고 싶다.

영화는 로드무비니, 빔 벤더스니 하는 추상적 지식이 아니라, “<고래사냥> 같은 거 너희 아빠랑…” 같이 구체적인 삶의 경험들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에게 마들렌은 처음에는 ‘책에서 본 과거와 현재의 매개물’이었다. 그러나 미래에 추억이 될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기로 하며, 새벽 골목에서 그녀와 마들렌을 먹고 난 뒤 마들렌은 ‘그의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매개물’이 된다. 그들은 아직 인생을 1쿼터밖에 살지 않은 이들이다. 아니 2쿼터를 막 시작하려는 이들이다. “그해 여름은 ‘인간’이 달에… 앞길이 구만리 같은 나이였으나, 어쩐지 ‘나’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느껴졌다…”라는 <달의 궁전>의 첫 문장과는 대비되는, ‘지금의 나’의 순간들이 미래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라 인식하고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들을 하나하나 만들어가고자 하는 주인공들의 태도는 얼마나 밝고 견실한가

아울러 영화는 최초의 계약이 우여곡절 속에서도 끝까지 지켜지는 것(<이 투 마마>, <밀애>에서는 유야무야)과 꿈을 가지고 열심히 사는 서로를 격려하며, “딸배()로 만난 사이라도 작별인사는 하”는 우애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녀와 친구간의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보살피는 자매애 역시 따뜻하다.

<마들렌>은 사랑과 성, 임신/출산, 그리고 인생에 대한 건강하고 진취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여러 요소들이 조금은 어색하게 버무려져 있지만, ‘반보 전진한 영화’로 의미부여하기에 충분한 미덕을 지녔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내내 반성하고 있었다. 그녀처럼 살고 싶다. 될까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chingmee@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