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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여름가을‥> 공동제작하는 판도라필름 대표
2003-01-29

사람들

감명 받았으므로,투자한다. 판도라 필름 대표 칼 바움가르트너

“평범한 한명의 사람으로서 그의 영화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초로의 프로듀서 칼 바움가르트너(54)는, 김기덕 감독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에 “왜 투자를 결정했나”라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그에게서는 그가 연신 피워대는 시가 향이 몸 전체에서 풍겨나왔다. “난 평론가가 아니라서 말하기 힘들지만, 영상에 대한 애정, 이야기를 푸는 방식, 서정성과 정확성이 김기덕 영화에서 돋보입니다. 게다가 김기덕 감독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빨리 작업하는 감독일 테면서도 디테일에서는 허우샤오시엔이나 에미르 쿠스투리차 못지않죠.” (웃음)

말로는 ‘평범하다’고 하지만, 바움가르트너는 세계 아트하우스 영화계에서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그가 1981년 라인하르트 브룬디히와 함께 설립한 ‘판도라필름’은 일마즈 귀니의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어>를 비롯해 아키 카우리스마키, 짐 자무시, 제인 캠피온, 에미르 쿠스투리차, 첸카이거 감독의 영화를 독일 내에 배급했고 1998년 이후로는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폴라X> <몬순 웨딩> 등을 제작단계서부터 참여하면서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독일의 유명 아트하우스 영화제작 및 배급사다. 독일에서 일하고 독일어를 모국어로 구사하지만, 그의 국적은 이탈리아. 원래는 오스트리아 땅이었다가 1차대전 뒤인 1919년 이탈리아로 넘어간 남티롤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고향에서 독일 남부 뮌헨까지 히치하이킹으로 이동해가서 누벨바그영화들을 ‘충전’하고 오기를 즐기는 열혈 영화소년이었다. 결국 15살 때 학교를 관두고 뮌헨으로 ‘이주’, 조감독 겸 비평가로 두 갈래의 영화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유럽 전역에서 학생운동의 깃발이 나부끼던 해인 1967년, 그는 모든 영화 일에서 손을 떼고 정치단체에 들어가 독일의 이민노동자들과 함께 극좌파운동을 했다. 몇년 뒤 그는 함께 운동을 했던 친구와 “극장이나 서점, 둘 중에 하나를 하자, 주사위가 나오는 대로”라며 주사위를 던졌다. 주사위는 ‘극장’으로 나왔고, 그는 프랑크푸르트에 ‘하모니’라는 시네마테크 극장을 차리고 프로그래밍과 티켓 판매 등 극장 전반의 일을 도맡으며 다시 영화 일로 돌아왔다. 판도라필름을 차린 것은 그뒤의 일이다.

판도라필름이 김기덕 감독의 신작에 투자 및 공동제작을 하기로 결정한 것은 지난 가을이었다. 이미 지난해 초 베를린영화제에서 <나쁜 남자>를 가지고 영화제에 참석한 김기덕 감독과 바움가르트너간의 만남이 있었다. 판도라필름은 전체 예산 15억원 가운데 후반작업 비용에 해당하는 5억원을 대고, 함부르크에서 후반작업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줄 예정이다. “독일이 한국보다 기술이 우수해서라기보다는 독일에서 뭔가 하는 것이 공동제작이라는 말에 걸맞기 때문”이라며, 그는 “이제 기술적인 면은 세계 어디나 비슷하다”고 말했다. 칼 바움가르트너는 판도라필름이 아직 배급만 하던 시절,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독일 내에 배급한 바 있다. 그당시 10만명 이상의 관객이 이 영화를 보았다고. 경북 청송의 산 속 연못 주성지 위에 지은 수중 산사를 배경으로, 동자승이 나이를 먹고 노승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자연에 빗대 그릴 김기덕 감독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도, 그는 “인간 존재의 근원을 찾아 헤매는 인간의 이야기이고, 여기에 대해 독일에 분명히 시장이 있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늘 부산영화제에 오기 위해 서울은 ‘환승’역이기만 했다는 바움가르트너.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제작발표회차 드디어 서울 땅을 밟은 그는, 하지만 너무 할 일이 많아 행사 다음날 독일로 돌아간다고 했다. 글 최수임 sooeem@hani.co.kr·사진 조석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