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해외평론가들이 바라본 한국영화 6편 [5]
2003-01-30

고양이를 부탁해,친구

<타임아웃>이 본 <고양이를 부탁해>디테일 에드워드 양처럼

정재은은 첫 번째 장편으로 익숙한 소재를 선택해서 이것을 제대로 만들어낸다. 이 영화의 높은 완성도는, 현장에 딱 떨어지는 연기와 상대적으로 극적인 사건이 없는 내러티브를 잘 고려하고 숙련된 페이스로 풀어나가는 것, 그리고 세세한 디테일에 초점을 맞춘 덕택이다. 이 모든 요소들은 때때로 에드워드 양을 연상시키면서, 이 영화가 광범위한 친화력을 갖고 넓은 범위의 관객에게 어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런데 좀 특이하고, 유감스럽게도 섹스에 대한 이슈를 다루는 데에서만은 머뭇거리는 것 같다- 혜주만이 인생의 이 측면에 조금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단점들은 연애 과정을 다룰 때 빠지기 쉬운 클리셰들을 조심스럽게 피하는 것으로 보완이 된다. 이것은 어떻게 사회적, 경제적, 기질적이고 가족적인 요소들이 소녀들의 인생과 야망에 영향을 끼치는가를 보여주는 데 집중하기 위한 선택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는 상당히 감동적이고 지적인 영화이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가벼운 유머의 순간들을 선사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 영화는 그 기이하고도 종종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학교를 떠난 뒤의 시간들에 대해 정말이지 책 몇권 분량이 될 만큼의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정 감독의 재치있고 숙련된 시나리오와 창의적인 연출이 보여주는 조용하고 요란하지 않은 확신감이다. 그리고 그녀는 시각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타임아웃> No. 1687, Dec 18 2002-Jan 1 2003, 제프 앤드루)

(<고양이를 부탁해>는 이때 <타임아웃>이 매주 선정하는 크리틱스 초이스 10편 중에서 2위에 올랐다. - 편집자)발췌·정리 이지연/ 런던 통신원

<키네마순보>가 본 <친구>운명의 비극은 스멀스멀

소독약을 살포하는 차가 뿜어내는 하얀 연기를 쫓아 아이들이 달린다. 골목을 빠져 나가, 상점이 늘어서 있는 길에서 환성을 지르는 아이들의 모습이 흰 연기 사이로 비치는 모습을 보고 있는 사이, 관객은 순식간에 그 시대로 빨려들게 된다. 그들이 어린아이였던 시대로, 그리고 우리가 어린아이였던 시대로.

<친구>에서는 무엇보다도 색을 누르고 명암의 콘트라스트를 강조한 화면 설계가 훌륭하다. 네거의 스킵블리치(Skip Bleach. 영화용 필름현상소에서 콘트라스트를 증가시키거나, 셰도를 어둡게 하거나, 이미지의 색 채도를 감소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 역자)라는 할리우드에서도 거의 하지 않는(포지를 스킵 블리치하는 경우는 있지만) 기법이 70년대의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그것은 준석이 아버지 앞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장면의 빛이나 색의 상태 하나만을 예로 들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고보니 70년대의 사건을 그려낸 사카모토 준지의 도 같은 네거 스킵 블리치를 이용했는데, 한국과 일본의 영화가 같은 기법을 선택했다는 것은 재미있는 우연의 일치다.

줄거리는 단순하다면 단순하다. 아이들 때에는 항상 몰려다니며 놀던 4명의 소년들이 17, 18살 즈음을 전환기로 하여 각 개인의 사정으로 완전히 다른 인생을 걷게 되고, 결국에는 야쿠자의 길을 선택한 두명이 서로를 죽이게 된다는 스토리는 그리 드문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운명이 가슴을 치는 것은 이 작품만이 갖고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뛰어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성장한 준석으로 분한 유오성은 마음을 완전히 빼앗아버릴 듯한 남성다움을 보여준다. <친구>에서 유오성을 보며 일본에서는 이런 얼굴을 한 남자를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을 절실히 하게 되었다. 그가 집에 놀러온 상택에게 여자친구를 소개해준 뒤, 그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동수에게 ‘내가 니 시다바리가’ 하며 덤빌 때, 그를 험악하게 노려보면서 ‘죽고 싶나’라는 말 한마디를 던질 때의 얼굴. 반대로, 상택을 격려할 때의 포용력 넘치는 웃는 얼굴. 물론 좀더 울적하고 초조한 모습을 겉으로 드러내는 동수 역의 장동건도 훌륭하다. 그 번뜩이는 표정을 보고 나는 오시마 나기사의 <태양의 묘지>에 나온 쓰가와 마사히코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에는 앞뒤로 서기도 하고, 원이 되기도 하고, 옆으로 늘어서기도 하면서 누가 누구의 위에 선다는 것과 상관없이 놀았던 4명의 친구들이, 고등학교에서 영화관에 가기 위해 달려가던 때를 마지막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그뒤 그들은 나란히 서거나 서로 마주보거나, 어떠한 위치와 자세를 선택해야만 한다. 준석과 상택은 때로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업어주기도 하지만, 마지막에 형무소 유리창 너머로 마주 앉기까지는 거의 나란히 서지 않는다. 그것과 반대로 동수와 준석은, 준석의 아버지 장례식날 밤에 벽을 등지고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마지막으로 정면으로 맞설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두 야쿠자가 정면으로 맞선 뒤에는 어느 한쪽이 흡수되거나, 서로 죽이게 될 수밖에 없다. 준석과 동수가 테이블을 끼고 마주 앉게 되는 장면에서 거의 운명적인 비극의 내음이 피어오르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친구’(親舊)라는 단어에는 ‘친우’(親友)와는 다른 깊은 울림이 있다(<키네마순보> 월순호, 우에노 고우시).번역 강민하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