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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의 <지구에서 영업중>
2003-02-03

황당무계한 로맨틱 스토리

어릴 적 고아원에서 헤어진 쌍둥이 진과 린이 있다. 진은 미국으로 떠났고, 세월이 흐른 뒤 멋진 청년이 되어 한국에 등장했다. 이를 반갑게 맞이한 것은 린. 십수년 만에 처음 만나는 쌍둥이 형제는 만나자마자 툭탁거린다. 린이 기거하는 곳은 거대한 빌딩. ‘man to man’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데, 개인적인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해결하는 곳이라고 한다. 린은 엄청 돈이 많고, 검은 양복의 보디가드가 있으며, 머리카락 하나면 10분 동안 변신이 가능하다. 여기까지가 <지구에서 영업중>의 구체적인 설정이다. 황당하다고 그렇다. 황당하다. 그러나 이 만화는 엄격하지도, 치밀하지도, 전복적이지도, 파괴적이지도 않다. 딱 편안한 상상의 틀 안에서 즐길 수 있을 정도만 황당하다.

스포츠신문 연재만화의 대척점

이시영의 <지구에서 영업중>은 2003년 한국 만화의 스펙트럼에서 스포츠신문 연재만화와 대척점에 존재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김성모의 <대털>이나 허영만의 <타짜>와 반대지점에 있다. 이야기에 삽입되거나 혹은 이야기를 끌고 가는 동력으로 존재하는 남과 남의 커플링, 귀여운 남자주인공, 감상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 독자가 궁금해하며 작가의 취재가 용이한 잡지사 편집부 등에 관한 에피소드가 <지구에서 영업중>의 코드라면, 그에 대응하는 <대털>이나 <타짜>의 코드는 성애묘사, 카리스마 넘치는 남자주인공, 인간의 비정함을 드러내는 이야기, 독자들이 흥미로워하고 특별한 취재가 필요한 감방이나 도박의 에피소드 등이다. 이들 코드는 이항대립으로 존재하지만, 지향은 동일하다. 각각 상이한 요소들처럼 보이지만, 독자들에게는 동일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두 작품을 보는 독자들의 취향이 전혀 다를 뿐 취향의 본질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시 찬찬히 읽어나가다보면, ‘man to man’이 탐정사무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린’이 (더불어 작품 시작과 함께 미국에서 돌아온 쌍둥이 ‘진’과 함께)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나 정신병을 앓고 있는 아들에 대한 문제, 기억을 잃어버린 절대적으로 악한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문제 등을 해결해 준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만화를 익숙하게 보아온 독자들이 아니라면, 이 만화는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앞에서 예를 든 스포츠신문 연재만화의 독자들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 만화의 독해를 둘러싼 비밀의 핵심은 이 만화가 어떤 코드로 구성되어 있고, 독자가 그 코드를 이해할 수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에 있다. <지구에서 영업중>이라는 만화를 조직하는 원리이자 여러 복잡한 맥락 속에 존재하는 코드의 문제만 극복된다면, <지구에서 영업중>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지구에서 영업중>의 핵심적 코드이자 여중고생(최근에는 초등학생까지)을 겨냥한 만화의 핵심코드는 ‘미소년과 그들의 커플링’이라는 코드다. <지구에서 영업중>도 검은 긴머리에 눈썹이 검고 착한 소년, 금발에 검은 얼굴 그리고 담배를 문 반항적인 소년, 뻗친 머리에 여자처럼 귀엽게 생긴 소년이 삼각구도를 이루고 있다. 미소년과 커플링의 코드는 하드코어한 설정에서 매우 소프트한 설정까지 다양한 폭을 보여주는데, 이 작품의 경우 두명의 상반된 성격을 지닌 주인공(흔히 야오이 만화에서 공과 수라고 표현되는)이 오래 전에 헤어진 쌍둥이 형제라는 매우 소프트한 설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만화는 본격적인 커플링 만화로 나가지 않고, SF, 판타지, 탐정, 코미디 장르를 뒤섞어 착한 사람의 작은 미담을 전해주는 것으로 에피소드를 마감한다.

맛있는 비빔밥

이시영의 <지구에서 영업중>은 10대 소녀 팬들, 더 정확하게 만화를 보고 있는 소녀 팬들이 좋아하는 미소년의 코드를 기본으로 다양한 장르의 특성을 집어넣고, 이야기의 전개에 지속적으로 캐릭터의 변화(극화형 캐릭터에서 희화형 캐릭터로)가 개입되며, 동화적인 미담이 펼쳐지는 만화다. 미소년 코드는 이 만화를 독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열쇠다. 많은 여성 만화에서 미소년은 성의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그것을 다시 조립해 탄생시킨 존재다. 미소년은 작품에 등장해 작가와 독자를 연결하는데, 그 연결의 패턴은 대부분 매우 관습적이다. 스포츠신문 만화에 등장하는 성묘사나 폭력묘사와 크게 다르지 않고, 일본 만화에 등장하는 미소녀들의 역할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만화가 특정한 코드를 이해하는 제한된 수용자들에게만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된 것이다.

작가 이시영은 다른 여성 작가들처럼 화려한 조명을 받거나 충성스러운 팬을 자랑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독자들의 취향을 읽어내고, 그것을 매우 부드럽게 비벼내는 그의 장기는 <Feel so good>에서 빛을 발한 뒤, 이번 작품으로 이어졌다. 2003년 오늘, 이 만화는 10대 여자 청소년들을 겨냥한 가장 트렌드한 만화다. 그러나 여전히 무언가 부족하고 아쉬움을 감출 수 없다. 그것은 이 만화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만화를 품고 있는 잡지와 그 잡지가 팔리는 방식에 대한 아쉬움이다. 오늘 우리가 보는 만화잡지의 모델은 대부분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에 국내에 들어온 것들이다. 문제는 90년대 급속한 성장과 호황 국면에서 만화잡지가 한국의 작가와 독자, 그리고 시장의 특성을 고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90년대 후반 불황이 시작되었고, 그 불황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만화잡지는 안일과 타성에 젖어 있다. 어디에서 시작되는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수요조사와 같은 시장조사와 작가의 창의성을 살려주는 팀워크, 치밀한 사전준비에 의한 기획과 마케팅이 어우러진 만화잡지를 보고 싶다. 한 작가의 재능에 기대 그 재능을 갉아먹지 말고(재능을 모두 소진한 작가들이 어떻게 용도폐기되었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