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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진기록 대행진 [2]
이다혜 2003-02-06

˝늬들이 한국 영화사를 알아?˝

가장 많이 영화화된 소재, 소설, 캐릭터 춘향

단연 남원골의 절세미인 춘향이었다. 1935년 문예봉과 한일송이 출연한 이명우 감독의 <춘향전>이 발표된 이후,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에 이르기까지 이 이야기는 모두 13번에 걸쳐 극영화로 제작됐다. 1999에는 애니메이션으로 <성춘향전>이 만들어지기도 했고, <탈선춘향전>(1960)이나 <그 후의 이도령>(1936) 같은 ‘유사작’도 발표됐다. 멜로드라마에 민족정서를 고루 녹인 이 고대소설이 그동안 가장 각광받았는다는 사실은 1961년 극적으로 표출된다. 당시 설 극장가에서 김지미를 내세운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과 최은희 주연, 신상옥 연출의 <성춘향>이 피할 수 없는 정면대결을 펼친 것. 결과는 신상옥의 압승이었지만, 사실 주가가 오른 것은 춘향 캐릭터였다. 당시 춘향을 연기한다는 것은 최고의 여배우의 다른 표현이었다. 김지미, 최은희 외에도 홍세미, 문희, 장미희 등 그동안의 춘향의 면면을 봐도 이는 입증된다.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은 소재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무려 359편의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그중에서도 <햄릿>이 93편으로 수위를 차지한다. 스크린을 제패한 캐릭터는 아서 코난 도일 경이 창조한 추리의 대가 셜록 홈즈. 1900년부터 1999년까지 모두 225편의 영화로 제작됐으며, 각각 2명의 흑인과 중국인을 비롯해 88명의 배우가 홈즈를 연기했다.

최초의 영화상 조선일보영화제

1938년 11월26~28일 부민관에서 열린 조선일보영화제. 첫 영화제답게 한해의 영화를 결산하는 게 아니라 그동안의 영화 중 최고를 꼽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수상작은 당시 상영가능한 무성영화 33편, 발성영화 12편 등 45편을 대상으로 한 일반 관객의 투표로 결정됐다. 각 부문 1위는 나운규의 <아리랑>(1926)과 안석영의 <심청전>(1937)이었다. 무성영화 부문 2위는 이규환의 <임자없는 나룻배>(1932), 3위는 안종화의 <인생항로>(1937)였고, 발성영화 부문 2, 3위는 나운규의 <오몽녀>(1937)와 이규환의 <나그네>(1937)였다. 영화상과 함께 영화에 대한 일반인의 영화전시회라는 행사도 열렸는데, 영화 제작과정을 설명하는 도표와 카메라, 조명기구 등이 전시됐다. 영화제 마지막날에는 영화배우와 연극배우가 총출동한 가운데 <막다른 골목>이라는 연극을 공연해 행사장이 터져나갈 듯했다.

세계 최초의 영화상은 1898년 1월 1일 몬테 카를로에서 열린 축제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프로와 아마추어를 모두 대상으로 한 경쟁 영화제로, 1등상에 80파운드, 그 외에 각각 40파운드와 20파운드의 상금을 수여하는 두 가지 상이 있었다고. 첫 수상작은 클레망-모리스의 <영화적 장치로 살아난 모나코>(Monaco vivant par les appareils cinematographiques).

가장 많은 컷과 가장 적은 컷의 영화 <무사>와 <생활의 발견>

가장 많은 컷을 가진 영화는 <무사>다. 애초 4시간 분량의 촬영분은 모두 4천컷이 넘었다. 편집을 거치면서 러닝타임은 155분으로 줄었고, 컷 수는 2500개 정도가 됐다. 한컷당 평균 3.72초인 셈. 반면 가장 적은 컷의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2002)으로 추론된다. 115분이 모두 117개 숏으로 이뤄져 있어 거의 1컷당 1분꼴. 정확히는 58.97초다. 이에 비견할 수 있는 작품은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1998)로 113분 동안 숏은 불과 120개 남짓해 평균 56.5초인 셈이다. 한편, 미국의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은 <세계로 발진하는 한국영화, 그리고 최근 영화사>란 논문에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은 한숏이 평균 25초지만, <생활의 발견>은 평균 59초를 기록한다며 “아시아적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어떤 경향”을 논했다.

가장 많은 컷의 영화는 100분당 컷수를 기준으로 3천컷에 이르는 서지 로드넌스키의 액션영화 <미완의 다이아몬드>(1996). 보통 할리우드 영화는 100분당 1100컷이 평균치로 알려져 있다.

최초의 한국영화

김도산이 만든 <의리적 구토>(1919). 총 28막3장의 연쇄극(키노 드라마).

최초의 무성 극영화

윤백남 감독의 <월하의 맹서>(1923). 35mm 3권 분량. 민중극단 단원인 이월화와 권일청이 출연했다.

제작진과 배우가 한국인으로 구성된 최초의 한국영화

김영환 감독의 <장화홍련전>(1924).

최다 대종상 수상작

정진우 감독의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로 제19회(1980년) 수상식에서 우수작품상, 남우·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등 9개 부문을 수상했다. 김호선 감독의 <사의 찬미>도 30회(1992년) 때 9개 부문을 수상했지만, 여기에는 특별부문상이 포함됐다.

최다 대종상 수상자

감독상은 <족보>(17회·1978년), <만다라>(20회·1981년) 등을 통해 5번 수상한 임권택 감독이 가장 많이 받았다. 신상옥 감독이 4회 수상. 남우주연상은 각각 3회 수상한 신영균(<연산군>(1회·1962년) 등)과 안성기(<깊고 푸른밤>(24회·1985년) 등)이며, 여우주연상은 최은희(<상록수>(1회·1962년) 등), 김지미(<길소뜸>(24회·1985년) 등), 강수연(<아제아제 바라아제>(27회·1988년) 등)이 3번씩 받았다. 촬영상 최다수상자는 <화녀>(10회·1971년)부터 <서편제>(31회·1993편)까지 모두 7번 상을 받은 정일성 촬영기사였다.

최초의 속편

이구영 감독의 <아리랑 그후 이야기>(1930).

최초의 미스테리 영화

작풍인 감독의 <괴인의 정체>(1927)

최초의 괴기물 영화

이창근 감독의 <투명인의 최후>(1960). 총제작비 3천만환.

최초의 액션 영화

김도산 감독의 <국경>(1923)

가장 많은 영화를 제작한 해

1969년으로 229편.

가장 적은 영화를 제작한 해

1995년으로 37편.

최초의 합작영화

해방 전 일본과의 작업은 합작이라 보기 어려운 점이 많다. 따라서 해방 뒤 최초의 합작영화인 김화랑 감독의 <천지유정>(1957). 이 작품은 임화수의 한국연예사가 홍콩과 합작으로 만들었다.

최초의 수출작

정종화씨에 따르면, 1956년 만들어지고 1958년 대만으로 수출된 윤봉춘 감독의 <처녀별>이다.

최초의 영화사

1924년 부산에서 설립된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제주도를 배경으로 <海의 悲曲>을 창립작으로 만들었다. 1895년 파리에서 레옹 고몽이 설립한 프랑스의 고몽 영화사. 최초의 스튜디오로는 토머스 에디슨이 1893년 뉴저지주 웨스트 오렌지의 에디슨 연구소 안에 세운 검은 지붕의 목조건물 ’블랙 마리아’.

최초의 영화잡지

1919년 발간된 <녹성>이라는 설(김종원, 정중헌, <우리영화 100년>)과 1928년 주간 이경손에 의해 발간된 <문예영화>라는 설(<영화연감>)이 양립하고 있다.

최초의 비디오 전용 영화

곽은경이 출연한 <산머루>(1988). 이때 첫 비디오용 영화가, 그것도 에로영화가 나온 것은 올림픽을 앞두고 비디오 기기가 급속히 보급됐고, 성에 대한 규제도 차츰 완화됐으며, 미국 메이저영화와 국내 영화의 판권료가 대폭 인상되면서 비디오 제작사들이 자구책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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