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5월4일 개봉,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
<미션 투 마스>(2000)는 너무 느리다. 이건 이상한 일이다. 할리우드의 유명 감독과 배우가 만들어낸 SF가 이처럼 속도의 계율을
철저히 거스른다는 건 믿기 힘들다. “조용할 필요가 없는 장면에서도 왜 이렇게 조용한가”라고 불평한 미국 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대원들이 파손된
우주선을 수리하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배우들이 마치 주어진 시간을 몽땅 써버리겠다고 작심한 것처럼 천천히 움직인다”고 썼다. 이건 물론 의도된
것이다. 보급선이 화성에 착륙하는 대목처럼, 다른 SF에서라면 흥행포인트가 됐을 긴박한 장면들이 아예 생략되기도 한다. 로버트 저메키스의 <콘택트>도
할리우드 SF치곤 꽤 차분한 편이지만, <미션 투 마스>에 미치진 못한다. <콘택트>가 또박또박 걷고 있다면, <미션
투 마스>는 게으르게 헤엄치고 있다.
독창성은 늘 의심받았지만, 당대 최고의 테크니션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평가엔 이견이 없던 브라이언 드 팔마는 60살이 되는 해에 생애 최고
제작비(9천만달러)를 들고 할리우드 사상 가장 기이한 SF 가운데 하나를 만들었다. 물론 흥행은 실패했고(미국 극장수입 6천만달러), “아무리
뒤져도 독창적인 모멘트는 전무한 것처럼 보인다”(<뉴욕타임스>) 같은 악평까지 짊어졌다. IMDB에 오른 네티즌 평점도 10점
만점에 4.8에 그쳤다. “추천할 순 없다. 그래도 비범한 구석이 있다”라는 로저 에버트의 평이 그나마 호의적인 편에 속한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상영된 뒤 프랑스 비평가들 사이에서만 높은 점수를 얻었다. 이 영화를 푸대접한 <씨네21>의 첫 시선은 미국 관객과 평론가와
다르지 않았다.
<미션 투 마스>가 독창적이지 않다는 말이 전적으로 틀린 것 같진 않다. 브라이언 드 팔마는 원래 독창성과 담을 쌓은 덕에 유명해진
사람이다. 그의 대표작 목록에 곧잘 오르는 <존 드라볼타의 필사의 추적>은 안토니오니의 <욕망>과 코폴라의 <컨버세이션>의
‘창조적 표절’이며, <드레스 투 킬>은 히치콕의 <현기증>과 <싸이코>를 짜깁기했다. <미션 투
마스>도 여러 SF영화를 생각나게 한다. 화성 탐사를 앞두고 대원 가족들이 파티를 벌이는 첫 장면은 <아폴로13>의 출발과
비슷하며, 외계 생명체에 대한 호의어린 관심은 <미지와의 조우>나 <콘택트>를 떠올리게 한다. 화성의 거대한 흙바람은
장관이지만 <미이라>의 모래바람과 유사하다. 무엇보다 드 팔마가 여기서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영화는 스탠리 큐브릭의 다. 우주선의 모형은 흡사하며, 어떤 장면은 앵글까지 옮겨놓았다.
<미션 투 마스>는 그러나 또다른 짜깁기가 아니다. <미션 투 마?gt;는 SF영화의 역사를 경유해 할리우드 SF를 넘어서려는
야심찬 모험이다. 이 여정의 귀착지는 원형의 SF, 그러니까 멜로도 액션도 호러도 들어설 자리가 없는 순수 SF의 기념비 다. 드 팔마의 오디세이는 수십년간 SF와 교배돼온 멜로와 액션과 호러를 경유한다. 아내를 잃고 우주선 조종사 자격도
포기한 게리 시니즈, 대원들을 살리기 위해 아내 앞에서 죽어가는 팀 로빈스의 얼굴엔 멜로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다. 첫 탐사 대원들 세명이
정체 불명의 생명체에 의해 목숨을 잃는 장면은 잠시 호러였다가, 구조대원들이 미소 유성으로 작동정지에 빠진 구조선을 벗어나 배급선으로 옮겨가는
대목에선 액션이 된다.
긴 여정을 거쳐 마침내 <미션 투 마스>는 이 난해한 방식으로 제기한 질문에 이른다. 우주의 비밀과
인간의 비밀은 한 가지가 아닐까? <미션 투 마스>는 이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드 팔마의 순박한 대답이다 . 생명의 근원은 우주에
있으며 우주야말로 인간의 고향이다. 초대형 상품으로서의 할리우드 SF가 오랫동안 타자화하고 도구화한 우주를 인간존재의 근원으로 사유하는
동양적 일원론으로 돌아간 것이다. 지구로의 귀환을 거부하고 화성인들과 동행을 결정한 게리 시니즈는 말한다. “그곳이 내 집이야. 그들이
나고, 내가 그들이야.”
질문과 대답이 진지하다고 해서 좋은 영화가 되진 않을 것이다. 이 영화의 철학은 60대부터 미국 문화의 한귀퉁이를 차지해온 뉴에이지적 세계관의
영화적 번안일 뿐이다. <미션 투 마스>의 진정한 감동은, 미국 평론가들이 비웃은, 느린 리듬에 있다. 정원 파티의 일상적 리듬에서
출발한 이 영화는 점점 무중력 상태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의 리듬과 함께 움직인다. “엔니오 모리코네 사이트에서 바로 다운로드받은 것 같다”는
조소를 받은 낯익은 음악은 호수가 돛단배를 애무하듯 배우의 동작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그것에 익숙해질수록, 관객인 우리는 그 고요와 느림의
품에 안겨 있다는 느낌에 점차 빠져든다. 무중력의 우주선 안에서 팀 로빈스와 그의 아내가 춤추는 장면에 이르면 그 느낌은 더이상 낯설지
않고 편안하다. 팀은 말한다. “지상에서라면 이렇게 멋있게 못 췄을 거야.”
<미션 투 마스>는 우리가 잃어버렸으나 오랫동안 간직했던 어떤 리듬, 어떤 정신적 육체적 상태로의 여행이 아닐까. 화성인과 합류하기
직전 게리 시니즈를 모종의 액체가 감쌀 때, 그 액체는 양수와 같다. 게리는 그 액체 안에서 환하게 웃는다. 그는 태아로 돌아간 것이다.
<미션 투 마스>의 진정한 도착지는 태아의 ‘생의 감각’이다. 잠재의식, 혹은 무의식에 갇혀 있을, 카오스 이전의 생명이 체험한
첫 리듬, 그 원초적 감각을 향한 여행이 바로 <미션 투 마스>다.
이런 방식으로 감흥을 해명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다. <미션 투 마스>의 리듬이 과연 태아의 ‘생의 감각’을 제대로 재현하고
있는지도 증명의 대상이 못 된다. 드 팔머는 낯익은 것들만을 모아 완전히 다른 리듬으로 연주한다. 모든 장면을 표절했다 해도, 그들이 한데
어우러져내는 합주는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 합주는 너무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생의 감각을 자극한다. <미션 투 마스>는
표절가가 어떻게 동시에 독창적 예술가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희귀한 영화다. 첫 대면에서 우리는 틀렸지만, 이제 기쁘게 이 영화를 2000년의
걸작 목록에 올리고 싶다.
허문영 기자
▶ <씨네21>이
틀렸다
▶ <플란다스의
개>
▶ <미션
투 마스>
▶ <파란
대문>
▶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
▶ <서극의
칼>
▶ <블랙
잭>
▶ <벼랑
끝에 걸린 사나이>
▶ <무언의
목격자>
▶ 악평세례를
받은 걸작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