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초이스 > 도서
피투성이와 친구들을 위하여,<쿠니미츠의 정치>

“철공소에 다니는 사람 따위가 쓴 글일 수가 없다.” 살생부, 피투성이, 역적 중의 역적…. 무시무시한 단어들이 박힌 글 하나가 세상을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다. 명부에 오른 이는 안절부절못하고 침을 튀기며 음모의 배후를 밝히라고 소리질렀다. 머지않아 임자가 나타났다. 하하. 그것은 국정원의 조직원도, 민주당의 책사도 아니었다. 일개 필부, 고등학교를 나와서 공장에서 기름밥을 먹고 있는 평범한 젊은이였다. 이럴 수가! 명부의 죄인들은 아직도 믿지 못할 것이다. 말이 안 된다. 어떻게 철공소에 다니는 놈이 국회의원들을 떼거지로 처형대에 올려놓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만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지. 그래서 말인데, 나는 반대로 말하고 싶다. 만화의 진실을 믿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피투성이와 친구들이 이 만화를 보면 더 큰일을 낼지도 모른다고.

머릿속이 근육으로 가득 찬 녀석?

<쿠니미츠의 정치>(학산문화사 펴냄)에 나오는 무토 쿠니미츠는 좀더 나간 놈이다. 학력은 중학교 졸업,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기 위해 수련한 국수치기 외에는 배운 게 없다. 주먹은 제법 쓰는 듯하지만 머릿속이 근육으로 가득 찼다고 놀림받기 일쑤인 무식한 근성 때문에 사고를 치는 일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 잔머리 지수 제로의 무턱댐이 비리 정치인들을 만나면서 폭발, 스스로 일본의 정치를 바꾸겠다며 시장 후보의 비서관으로 나서게 만든다.

정치 만화란 언제나 의구심을 가지고 접근하게 만든다. 거기엔 언제나 ‘한쪽의’ 의도가 존재하고, 국가 차원의 문제에서는 정의가 국익에 따라 서로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히로카네 겐시의 <정치 9단>이나 이케가미 료이치의 <생추어리>에서 제기하는 개헌문제는 일본의 자존이라는 논리에서는 수긍이 가나, 군사대국 일본의 과거 행적을 아는 우리로서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이현세의 <남벌>이나 허영만의 <벽>과 같은 우리 만화에도 똑같은 국수주의적 편향이 존재한다.

<쿠니미츠의 정치>를 만든 안도 유마(글), 아사키 마사시(그림)라는 존재는 거기에 좀더 다른 차원의 의구심을 더한다. 이 두 사람의 전작은 바로 <미스터리 극장 에지>다. 그들은 범인 체포를 통한 정의 실현이라는 미명 아래 청소년들에게 마약, 살인, 강간 등 폭력적인 욕망을 분출시킨 ‘논란 많은 범죄물’의 창작자들이다. 그런데 그 쾌락과 재미에 대한 열망이 <쿠니미츠의 정치>를 전혀 다른 색깔의 정치 만화로 만들어가고 있다. 그들은 정치에 대해서는 조금 덜 알진 몰라도, 소년들이 어떤 지점에서 피가 끓는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 단순하게 말하자면, <슬램덩크>의 강백호나 <건방진 천사>의 겐조가 정치에 뛰어든 듯한 만화가 만들어졌다. 머리는 모자라지만 정의에 대한 열망과 순수함은 넘치고 쏟아져, 눈앞의 악을 보면 미친 듯이 달려드는 무데뽀 소년 주인공을 통한 정치 입문이다.

<슬램덩크>의 강백호나 <건방진 천사>의 겐조가 정치에 뛰어든 듯한 만화 <쿠니미츠의 정치>.

쿠니미츠의 첫 무대는 신치바가사키라는 작은 도시. 뿌리 깊이 썩은 국회의원과 시장, 그들에 밀착된 기업체의 사장들이 시민들의 단물을 쪽쪽 빨아먹고 있는 곳이다. 쿠니미츠는 청렴한 시장 후보 사카가미 선생의 비서관으로 나서 현실 정치의 첫 경험을 하게 된다. 정치판은 썩을 대로 썩어 있고, 사람들은 한없이 냉담하다. 그러나 아는 게 없는 그이기에 겁도 없이 달려든다. 정치는 책략이라지만, 그 책략을 넘어선 열망이 어떻게 사람을 움직이는가를 보여준다. 고등학교 선거에 뛰어든다. 닭 모이 주는 게 일과인 순수한 소년을 학생회장에 올려세운다. 선거 유인물을 만드는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테니스 선수였던 청년의 꿈을 되찾아준다. 서서히 그의 주변에 사람이 모여들고, 그러면서 그들 반대편에 누가 서 있는지 분명히 드러난다. 한줌도 안 되는 부패 정치인과 악덕 기업주들이 시민들의 꿈과 행복을 쪽쪽 빨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열망은 사람을 움직인다

그래. 분명히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멀다. 궁지에 몰리자 옷 벗기 쇼를 벌이는 여자 정치인이나 작은 도시에 꾸물꾸물 몰려드는 종교 집단의 이야기는 황당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과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는 아니다. 이 만화는 소년들의 흥미를 끌어들일 많은 재미를 던져주면서, 한마디씩한마디씩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나간다. 만화가인 안도-아사키 커플이 가장 잘하는 것도, 그 주인공인 쿠니미츠가 가장 잘하는 것도, 어깨가 들썩들썩하게 사람들을 부추기고 그 흥겨운 힘으로 나쁜 놈들을 때려부수는 일이다. 전작인 <미스터리 극장 에지>에서 한 단계 올라간 훌륭한 묘사는 이 작품을 보는 즐거움을 극대화한다. 한 주인공의 얼굴을 한 페이지에서 다섯개의 화풍으로 전혀 다르게 그리면서도 그 각각을 분명한 생명력으로 어우러지게 하고, 눈치만 보는 회사 직원들의 꼬리 잇기 책임 전가를 맛깔나는 표정 묘사로 후려낸다. 완전히 세로로 어긋난 눈과 아귀처럼 벌어진 입의 악마체 쿠니미츠와 그의 노력으로 학생회장으로 당선된 미타라이의 순박한 명랑 만화체는 서로 정반대에 있으면서도 즐겁게 손을 잡는다. 그래. 정치가 이렇게 즐겁다면,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일은 투표일 것이다.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 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