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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종합학교 애니메이션과 졸업작품전

모든 것을 쏟아부은 `졸작`

‘졸작’이라는 게 있다. 형편없는 작품이 아니다. 주로 예술계통 학과 학생들이 학창 시절의 결실을 맺는다는 생각으로 갖은 재주를 다 부리는 ‘졸업작품전’ 말이다. 학교 다닐 때는 가끔 그런데도 초대를 받아 꽃 한 송이나 초콜릿 껍질을 들고(내용물은 보통 미리 먹었다!) 간 적도 있었다. 그런 곳의 분위기는 물론 잔칫집이다. 손님들도 대부분 가족, 친지나 친구들이어서 좀 나쁘게 말하면 끼리끼리 모이는, 아는 사람만 오는 자리가 돼버린다.

회사 연수차 런던에서 1년간 지낸 적이 있다. 애니메이션을 공부한답시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몇번 찾아갔던 곳이 왕립예술학교(RCA, Royal College of Arts)였다. 하이드 파크 옆에 있어서 풍광도 좋고 쾌적했던데다 ‘왕립’(로열)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가 왠지 근사해 보였기 때문인 것으로 기억한다.

애니메이션학과 교수님도 인터뷰해보고 학생, 졸업생과도 만나보고 하다가 우연찮게 ‘졸작’에도 참석하게 됐다. 눈에 띄는 점은 두 가지였다. 우선 사람이 많았다는 것. 아는 사람이 와서 축하해주는 분위기가 아니라 ‘로열’ 애들은 어떻게 만들었는지 한번 보자는, 초를 좀 치면 살벌한 분위기였다. 두 번째는 상영작품 말미에서 후원사들의 이름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재주있는 학생들의 경우 이미 재학 중에 입도선매가 이뤄진다는 게 루스 링퍼드 교수의 얘기였다. 상영관 앞에는 학생들의 명함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명함이 얼마나 없어졌느냐는 작품 인기도의 바로미터였다.

2월5일부터 9일까지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졸작’이 열렸다. 학부생인 예술사(BFA) 과정 7명과 대학원 과정인 전문사(MFA) 과정 1명이 함께 마련한 ‘브랜드 뉴 8’이라는 제목이었다. 전문사 과정은 예술종합학교에만 있는 국내 유일한 코스다. 논문을 쓰고 졸업하는 일반 대학원 석사학위가 아닌, 작품으로 승부하는 과정이다. 올해 처음으로 1명의 전문사가 나왔다. 홍익대 미대 출신의 하상목(29)씨다. 그의 작품 <눈물, 떨어지다>(She wept)는 컴퓨터로 만들어낸 판타지였다. 살아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가 하는 질문이 녹아 있다. 나비 모양의 등장인물은 정교하고 화려했다. 대사가 없는 대신 화면 오른쪽에 기다란 한글 자막이 촘촘했다. 무슨 내용인지 알기 위해 작은 글씨를 읽는 데 정신을 집중하다보니 이번엔 화면을 제대로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아쉬웠다. 하씨는 “대사를 내레이션으로 집어넣는 등 손을 좀 보겠다”고 말했다.

대체로 고른 수준의 학부생 작품 중에서는 김진우씨의 <리턴>(Return)이 눈에 띄었다. 우주선 내부의 공간감과 우주비행사의 움직임을 돋보이게 처리했다.

전반적으로 작품들이 무겁다는 느낌이었다. 독립작품들의 특징이기도 한 이 ‘묵직함’은 때로 사람들의 눈꺼풀을 사정없이 밑으로 내려당기기도 한다. 진지하면서도 삶을 통찰하는 유머가 담겨진 작품을 만드는 데 좀더 고민을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칭타칭 국내 애니메이션계를 선도해간다고 자부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작품전은 그러나 썰렁했다. 손님이 적다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4년간, 또 3년간 자신의 창의력을 불태운 젊은 작가들의 번득이는 창의력을 흡수해보려는 제작자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는 얘기다(내가 작품전을 본 것은 첫쨋날과 둘쨋날이었다. 부디 주말에는 많은 제작자들이 참석해서 ‘왜 오보를 썼느냐’는 항의메일이 쇄도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현재 전국의 만화애니메이션 관련학과는 114개에 달한다고 한다. 이 많은 학교를 다니는 그 많은 학생들이 매년 졸업작품전을 연다. 자존심이 있는 학생들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작품들일 게다. 그런 싱싱함을 그냥 버린다는 것은 죄다.정형모/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hy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