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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팍하고 평면적인 코미디 <동갑내기 과외하기>

나태한 `과외`는 가라

얼마 전에 DJUNA는 <엽기적인 그녀>에 대해 두 페이지짜리 유익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DJUNA가 지금 여기에서 <동갑내기 과외하기>라는 영화에 대해 끼적거리고 있는 것도 사실은 바로 그 글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동갑내기 과외하기>라는 영화는 개봉도 되기 전에 <엽기적인 그녀>의 속편격인 작품으로 여겨진다는 말이 된다.

따지고 보면 그럴 만도 하다. 두편 모두 실제 경험에 바탕을 둔 통신망 연재물이 원작이고 괴팍한 주인공과 비교적 평범한 화자의 관계를 스토리의 기둥으로 삼고 있다. 요란한 코미디로 시작했다가 신파 멜로로 떨어지는 스토리 전개도 비슷하고.

이것도 생각않고 덜컥 원고 청탁을 받아들인 뒤 DJUNA가 얼마나 후회했을지 한번 상상해보시길. 한마디로 이전에 쓴 리뷰의 속편을 써야 할 입장에 몰린 것이다. 속편 영화는 설정을 바꾸고 등장인물들과 배우들을 고쳐서 새로운 맛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옛날 글을 재활용한다는 욕을 먹지 않으면서도 기본 핵심에 대한 비판이 거의 똑같을 수밖에 없는 두 번째 영화에 대한 리뷰를 어떻게 써야 할까?

가장 손쉬운 방법은 두 영화의 차별성을 과장하는 것이다.

다른 듯 비슷한 영화, 어떻게 차별할까

한번 해보자. <엽기적인 그녀>와 <동갑내기 과외하기>에서 두 주인공의 역학관계는 같지 않다. <엽기적인 그녀>의 두 주인공은 기본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다. 여자주인공이 휘둘러대면 남자주인공이 끌려다니며 받아주는 식이다. 하지만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화자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두 사람은 영화 속에서 결투 중이다. 남자주인공은 배배 꼬며 공부를 안 하려고 하고, 여자주인공은 어떻게든 애를 공부로 끌어들여 자기 일을 하려 한다. 적어도 영화가 의도하는 두 사람의 상관관계는 바로 이런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이런 차별화 때문에 <동갑내기 과외하기>가 <엽기적인 그녀>보다 더 나아졌는가?

미안하지만 그렇다고는 못하겠다. 여기엔 두 영화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는 작품들이라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 개념만 따지면 가해자/피해자의 구도나 결투구도 어느 쪽이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 <동갑내기 과외하기>는 <엽기적인 그녀>보다 못하다면 못하지 결코 나을 것 없는 영화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영화가 맥이 빠지는 이유는 <엽기적인 그녀>와 거의 같다. 한마디로 기본 설정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설정 활용 못하기는 <동갑내기 과외하기>가 조금 더 심하다. 이 이야기가 제대로 먹히려면 두 개성 강한 주인공들의 피터지는 대결이어야 한다.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홍보용 사진들은 영화보다 오히려 더 분명하게 주제와 설정을 이해하고 있다. 이야기가 제대로 되려면 홍보사진의 김하늘이 그러는 것처럼 제자의 귀를 물어뜯고 야구방망이를 들고 와이어 액션을 선보여야 한다. 하지만 영화는 자기가 <엽기적인 그녀2>라도 되는 것처럼 ‘엽기적인 캐릭터’ 지훈에게 끌려다닌다.

그렇다면 지훈은 과연 시간을 투자할 만한 캐릭터인가?

<엽기적인 그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새로운 개성도 비전도 없는 주인공이 어떻게든 ‘엽기적’이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는 광경이 얼마나 딱해 보이는지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동갑내기 과외하기>와 비교해보면 <엽기적인 그녀>의 그 처절함은 굉장한 장점이다. 적어도 재미있어 보이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건 재미도 없으면서 그냥 멍하니 서있는 것보다는 낫다. 적어도 그 올림픽 정신은 칭찬해주어야 마땅하다.

한마디로 말해, 지훈은 혐오스러울 정도로 매력이 없는 캐릭터다. 성격 자체가 혐오스러우면 차라리 좀 낫겠다. 진짜 문제는 이 캐릭터가 그냥 따분할 뿐이고 바로 그 따분함이 혐오감을 조성할 수준이라는 것이다. 녀석은 ‘부모 잘 만나 호강하는 깡패’보다 복잡한 표현이 필요한 존재가 절대로 아니다. 8시간50분의 체감 러닝타임 동안 이 캐릭터는 털끝만큼의 발전도 보여주지 못한다. 후반부의 신파 멜로가 어떻게든 지훈을 뭔가 쓸 만한 존재로 만들어주려고 기를 써도 달라지는 건 없다. 행인지 불행인지, 지훈의 멋대가리없는 건방은 이 영화에서 전적으로 감정이입할 수 있는 몇몇 순간들을 제공한다. 수완이 지훈의 방자한 행동에 짜증이 나 몸을 틀어대고 비명을 질러대는 장면은 이 영화가 제대로 자기 의도를 달성한 거의 유일한 예술적 성취의 순간이다. 그 장면에는 정말! 모두가 공감할 만한 진실이 담겨 있다.

여기서부터 이 글은 조금이라도 표준에서 벗어나면 마치 세계의 7대 불가사의라고 되는 것처럼 떠받들고 신기해하는 한국의 문화적 환경에 대한 분석으로 흘러가게 되지만, 그 이야기는 이미 <엽기적인 그녀>를 다룰 때 한번 했으니 반복하지는 않겠다. 그 대신 다른 이야기를 한번 해보자. <엽기적인 그녀>와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작위성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걸까?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실패, 왜?

한번 예술의 진정성에 대해 생각해보자. <동갑내기 과외하기>에는 어떤 진정성이 담겨 있는가?

이 질문은 굉장히 거창하게 들린다. 아마 많은 독자들은 처음부터 가볍게 웃기려는 영화로 시작한 <동갑내기 과외하기>라는 영화에 진정성이라는 심각한 단어를 강요하는 건 불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에 철저한 오락만큼 진정성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분야가 있을까? 생각해보라. 철학과 같은 심각한 장르에서 가끔 가다 진지함으로부터 살짝 벗어나려는 시도는 오히려 매력적이고 신선한 지적 유희처럼 보인다. 하지만 즐거움 자체가 목적인 오락에서는 그런 뒷문이 없다.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진지하게 온몸을 던지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김만 빠지게 된다.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실패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조금 이른 시기에 개봉된 영화인 <품행제로>와 한번 비교해보는 게 좋겠다. 둘 다 짜증날 정도로 재수없는 학교 깡패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고 비슷한 수준의 과장된 액션으로 범벅이 된 작품들이지만, 전체적인 즐거움과 성취도의 차이는 상당하다. 그건 왜일까? 80년대에 대한 기억을 노골적으로 팔아먹는 것을 제외하면 <품행제로>가 특별히 더 거창한 영화적 상상력을 구사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동갑내기 과외하기>와는 달리 <품행제로>는 주인공 중필에게 진지하다. 영화는 주인공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고 정확하게 묘사한다. 영화 초반의 와이어 액션 장면들은 황당한 허풍이지만, 그건 중필이라는 캐릭터와 그 캐릭터가 소속돼 있는 당시 고등학생 남자아이들의 제한된 상상력을 상당한 정확도로 묘사한다. 이 묘사에는 단단하고 사실적인 기반이 있다. 하지만 <동갑내기 과외하기>에 종종 등장하는 액션신은 ‘남들이 했으니 나도 해보자’ 이상의 의미는 없다. 한마디로 나태한 게임인 것이다.

비교가 약간 어긋났는지도 모르겠다. <품행제로>에는 시작부터 약간의 깊이가 존재하는 영화였다. 2000년대의 시선으로 80년대를 바라보는 방식, 당시 아이들의 가지고 있었던 허상과 실체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 덕택에 영화의 기본 아이디어는 시작부터 3차원적이었다. 하지만 <동갑내기 과외하기>는 처음부터 평면적인 아이디어로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에 좀더 잘 어울리는 ‘납작한’ 영화를 예로 드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나 그런 ‘납작한’ 영화는 생각 외로 찾기 힘들다. 심지어 <총알탄 사나이>처럼 원초적으로 노골적인 코미디도 그렇게까지 간단하지 않다. 프랭크 드레빈의 주절주절 읊어대는 코믹한 독백들은 관객이 40년대 필름누아르와 그 당시 남성들의 허세에 대해 익숙하기 때문에 효과적이다. 사실 정말로 ‘납작한’ 영화들은 엄청난 예술적 성과가 없으면 깊은 인상을 남기기가 힘들다. 거기서부터는 거의 교향곡과도 같은 순수예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동갑내기 과외하기>에도 진정성의 가능성은 존재한다. 마분지를 오려 만든 것 같은 지훈과는 달리 수완에게는 현실의 배경이 있다. 이 캐릭터는 더 이해하기 쉽고 종종 ‘엽기적인’ 지훈보다 더 편하게 어필한다. 자,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여기 극단적으로 짜증나고 매력이라고는 약에 쓰려고 해도 찾아볼 수 없는 마분지 캐릭터와 조금 더 다듬으면 입체적이고 호감가는 존재가 될 만한 캐릭터가 있다. 좋은 ‘오락영화’라면 어느 쪽에 러닝타임을 투자해야 할까? 당연히 후자다. 하지만 영화는 전자로 흘러간다. 그게 더 ‘엽기적’이고 ‘쿨’하기 때문이다. 물론 대상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른다.

여기서부터 DJUNA는 갑자기 <엽기적인 그녀>와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신파 멜로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신파 멜로는 이 영화들이 어떻게든 진정성에 도달하기 위한 필사적인 발버둥인 것이다! 두 영화 모두 죽었다 깨어나도 정공법으로는 주인공들을 살아 숨쉬는 캐릭터로 만들 수 없다. 해결책은 옆문을 트는 것이다. 신파 멜로를 통해 영화는 주인공의 감정을 이해하게 되고 그 과정을 통해 진정성의 목표는 ‘달성된다’.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신파 멜로를 만들면 되지, 무엇 하러 앞에 8시간49분짜리 코미디를 덧붙이느냐 말이다.

여기서부터 DJUNA는 갑자기 관대해져서, 아마도 원작이 된 책이나 만화는 더 나은 작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조금 더 나아가, 지훈의 모델이 되었다는 그 딱한 실제 인물이 영화보다 덜 짜증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이 대상과 대상의 한계를 이해하는 손에 맡겨진다면 좀더 참을 만한 영화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추측까지 해본다.

<동갑내기 과외하기>가 던지는 질문은 상당히 심각하다. 얄팍한 코미디이건 깊이있는 사회물이건 영화를 만들기 전에 확인해야 할 기초적인 사항은 모두 같다. 과연 대상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있는가? 과연 영화 전체와 자기 자신을 진지하게 그 대상에 투자할 수 있는가?

DJUNA는 <동갑내기 과외하기>를 만든 사람들이 <개그 콘서트>의 코미디언들을 보고 웃는 관객처럼 킬킬거리면서 이 영화를 만들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소재가 웃겨 킬킬거리는 것만으로는 좋은 코미디를 만들 수 없다. 의심나면 <개그 콘서트>의 아무 멤버나 하나 골라서 물어보길. 듀나/ djun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