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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면서 까발린다,유럽의 마이클 무어 열풍
황선우 2003-02-18

지난해 12월 초였다. 사회학을 전공하는 딸이 같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기에 뭘 보고 싶느냐고 물었더니 대뜸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을 꼽으면서 대학생들 사이에서 이 영화의 인기가 대단하다고 했다. 마침 나도 무어 영화를 보려던 참이어서 둘이서 영화관으로 갔다. 그러나 표는 이미 매진된 상태였고 며칠 뒤에 다시 갔지만 그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1월 중순쯤에 영화를 볼 수 있었는데, 그때는 평소 영화관에 잘 들르지 않는 남편도 동행했다. 남편은 무어가 3년 전에 쓴 책자 <멍청한 백인들>을 막 읽고 난 뒤였다.

여기까지는 마이클 무어 작품의 이례적인 성공을 말하기 위해 사적인 이야기를 꺼냈던 것으로, <볼링 포 콜럼바인>은 지금까지도 입에서 입으로 선전되면서 같은 영화관에서 3개월째 상영되고 있다. 좌석 200석의 영화관 클럽은 내가 살고 있는 스위스 바젤의 중심지에 자리한, 예술영화를 집중적으로 상영하는 곳으로서 이 글을 쓰기 위해 극장쪽에 입장권 판매 실적을 물어봤더니 2만매 정도가 팔렸다고 했다. 그렇다면 바젤시의 인구 20만명 가운데 10%가 <볼링 포 콜럼바인>을 봤다는 소리며 또 2002년 스위스 국내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사미르 감독의 다큐멘터리 <포 바그다드>가 전국 상영을 통해 동원한 관객 수의 두배에 가까운 숫자다.

스위스는 60년대부터 우수한 다큐멘터리 작품을 만드는 곳으로 이름이 나 있다. 니옹의 유명한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가 이를 잘 대변해주고 있으며, 그런 전통 때문에 외국 다큐멘터리가 이곳에서 성공하기 쉽지 않은데

<볼링 포 콜럼바인>을 배급하는 파테필름에 의하면 바젤에서의 흥행 성공은 예외가 아닌 전 유럽적인 현상이며 영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도 지난 가을부터 장기상영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던 <멍청한 백인들>은 유럽에서도 번역판이 나올 정도로 인기가 높아 <볼링 포 콜럼바인>의 열기를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으며, 그런 틈을 타고 바젤의 또 다른 예술영화관에선 무어의 1989년작 <로저 앤드 미>와 1997년작 <더 빅 원>을 상영하여 관객으로부터 환영받고 있다.

무어의 작품이 이처럼 성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볼링 포 콜럼바인>은 2002년 칸영화제에서 평소에 없는 다큐멘터리 우수상을 받았고 시상식에선 15분에 넘치는 관중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리고 그뒤에도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주요상을 받으면서 무어는 미디어계의 스타로 떠올랐으며 유럽 굴지의 파테필름이 배급을 맡는 행운까지 차지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국제 성공의 필요조건은 될지언정 관객동원의 개런티는 아니다. 관객을 끌어모으는 진짜 힘은 무어의 뛰어난 작품성이며 절대권력에 용감히 맞서는 작가의 고발정신이다. 대표적인 예는 찰턴 헤스턴을 인터뷰하는 장면이다. 무어는 인터뷰를 통해 <십계>와 <벤허>의 주인공 배우로서 한때 할리우드 기독교 모럴의 상징이었던 헤스턴이 실은 철저한 인종주의자이며 폭력문화를 부추기는 시민 무기소유권의 대변자임을 과감히 밝히고 있다.

성상파괴자 무어, 그는 9·11 사건 이후 미국사회를 덮친 애국심 히스테리에도 불구하고 <멍청한 백인들>에서 부시 정권을 불법자들의 쿠데타로 규정하고 인간 부시의 치부를 속속들이 들어내는가 하면 <볼링 포 콜럼바인>에선 역대 미국 정부의 피로 점철된 폭력정책과 미국인들의 광적인 무기소유욕 그리고 그로 인한 사회의 불안성을 사회학자의 시각에서 예리하게 파헤친다.

올해 48살인 무어는 1989년 첫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부터 60년대를 서두로 미국 다큐멘터리의 작업방식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시네마 베리테의 전통을 저버린 감독이다. “벽에 붙은 파리처럼 철저히 사건의 관찰자”가 되기를 고집했던 시네마 베리테 감독들과는 달리 무어는 작품마다 사건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배우와 해설자의 역할을 혼자 해낸다. 그리고 평론가들이 ‘산탄법’으로 부르는, 총알처럼 탁탁 튀는 편집 리듬과 최신 작품에서 따온 애니메이션 삽입은 여느 다큐멘터리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자적 스타일이다.

그러나 무어 작품의 진수는, 그게 책이든 영화든, 무어 특유의 재기 넘치는 유머와 통렬한 풍자다. 그래서 무어의 작품을 대하다보면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도 웃게 되고, 그 웃음을 통해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와 여유를 얻게 된다. 이게 바로 무어 작품의 성공 비결이 아닐까? 바젤=임안자/ 해외특별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