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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록에서 하드록으로,델리 스파이스 5집 <Espresso>
2003-02-21

델리 스파이스는 한국 최초의 모던 록 밴드 중 하나이다. 비교적 최근에 태어난 장르/스타일들이 그렇듯, ‘모던 록’ 또한 난삽한 유전자를 지닌 용어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는 ‘매끈한 선율에 내성적인 정서(가사)를 지닌 기타 팝/록’이라는 해석이 승리했고, 델리 스파이스의 음악은 그 승리의 주요 공신이다. 영화 <후아유>(2002)의 사운드트랙에 리메이크되어 실리기도 한 <챠우챠우>를 듣다보면 델리 스파이스의 시작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데, 반복적이면서도 인상적인 선율과 가사, 재기 넘치는 기타 연주, 예민하고 정감어린 편곡은 이들의 데뷔 음반을 관통하는 특징이었다. 그뒤로도 석장의 음반을 내놓으면서 다양한 스타일(전자음, 관현악 등)을 건드렸지만, 그 중심은 언제나 명료한 선율을 지닌 기타 팝/록에 있었다.

하지만 2년 만에 나온 새 음반은 베테랑 밴드의 자기쇄신 노력을 보여준다. 결론부터 말하면 강렬한 기타 사운드와 빨래판 긁듯 거칠게 내달리는 드럼을 바탕에 둔 하드 록으로의 방향선회이다. 변화에 대한 선언문인 양 짧고 굵은 <노인구국결사대>는 공연 오프닝에서 이 곡을 연주할 때 아우성칠 청중이 떠오르고, 뒤를 잇는 <날개달린 소년>은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여러 겹의 기타음이 인상적이다. 피아노의 장엄한 아르페지오로 곡을 여는 <키치죠지의 검은 고양이>는 밴드의 야심작이라 할 만한데, 고양이에 대한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아픈 추억을 담은 가사와 우울한 곡조가 맞물려 묘한 감흥을 던져준다. 이런 강성의 사운드를 피곤하지 않게 들을 수 있는 것은 예전 델리 스파이스의 흔적을 아예 묻어버리지 않은(혹은 못한) 탓이다. 혹시 저릿저릿한 기타 노이즈 때문에 모르겠다면, <별빛속에>가 나올 때 CD 플레이어의 베이스 레벨을 0으로 맞춰보라.

이러한 변화에 대한 평가는 아마 델리 스파이스가 이 음반에 도입한 록 사운드가 앞으로 나아가는(즉, 현재 유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뒤를 돌아다보는 종류의 것이라는, 다시 말해 다소 고색창연한 하드 록이라는 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를 놀랍지 않은 절충이라 부르기엔 밴드가 행한 자기혁신이 전면적으로 보인다. 동시에, 이전 델리 스파이스의 상큼한 감수성을 그리워한다면 무언가 부족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건 간에 곱씹어볼 만한 음반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무모한 시도를 비난하기 위해서건 베테랑 밴드의 ‘불변하는 변화’에 찬사를 바치고자 함이건.

그러나 음반의 구성이 나무젓가락 나누듯 뚝 잘린 것 같다는 느낌을 말하지 않으면 이 글을 마무리지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일곱 번째 곡인 <우주로 보내진 라이카>를 기점으로 음반은 초반의 분위기에서 급격히 이탈하여 델리 스파이스 본연의 우주로 돌아가는 것이다. 정규 음반 한장과 보너스 음반 한장이 이어진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후반부의 곡들이 반가우면서도 맥이 풀리는 것은 그 탓이다. 끝까지 밀어붙였다면 차라리 승리한 패자라도 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음반 제목 <Espresso>는 멤버들의 설명에 따르면 ‘급행, 특급’을 뜻하는 이탈리아어라지만, 정작 음반은 달리는 도중 버스로 변한 특급열차 같다. 그럼에도 승차감은 편하고 목적지는 분명하니, 여행은 여전히 할 만하다.최민우/ 웹진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