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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것은 맨 나중에,<길버트 그레이프>
2003-02-26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가 이즈음이었던 것 같다.긴 대학 시절을 마감하고 한 영화사에 문을 두드렸을 때다. 그때 면접과 몇 가지 시험을 치른 뒤 첫 출근 직전 나의 사회생활 첫 사수인 그 선배를 만나던 날이다. 충무로의 베어가든에서 만난 그녀는 인상이 아주 차분하고 목소리가 좋았으며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첫인상이 군인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그런 강직함 뒤에 무수한 망설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 망설임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런데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가 “김정영씬 기획실 업무보다는 연출을 하면 딱 어울릴 것 같군요”. 이 말을 한 것이다. 순간 난 한숨이 나오며 아, 그녀도 창작을 꿈꿨던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좋아하게 되었다. 마치 알에서 깨어난 오리마냥 그녀를 사회생활에서 엄마라고 생각하고 졸졸 따라다닌 것이다. 마치 <눈사람>에서 형부를 쫓아다니는 연욱처럼….

그때 처음으로 마케팅한 영화가 조니 뎁 주연의, <개같은 내 인생>의 스웨덴 감독 라세 할스트롬의 할리우드 진출작 <길버트 그레이프>였다. 디카프리오의 거의 신기에 가까운 연기와 상큼한 줄리엣 루이스의 짧은 머리에 짱구이마가 귀엽게 반짝이던, 그리고 수심 가득한 조니 뎁의 한숨이 인상적이던 그 영화…. 말썽쟁이 동생들과 집 밖으로 한 발짝도 안 나가는 우울증에 걸린 뚱뚱한 어머니와 몇년 전 자살한 아버지의 흔적이 그대로 남은 낡은 집에 살면서 일상의 굴레에서 답답하게 사는 청년 조니 뎁. 그는 자유롭게 트레일러로 여행하며 사는 소녀 줄리엣 루이스에 반하고 그녀를 동경하지만 결코 그런 용기없이 망설이다가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집을 불태우고 트레일러로 여행을 떠나며 끝나는 영화다. 일종의 자아를 찾는 성장기 영화 코드를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다. 우리 모두 이렇게 자유롭게 훌훌 벗어던지고 여행하지 못하는 생활인에 불과하지만 그들을 동경하며 살다가도 항상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다’는 딜레마에서 허우적대며 회사원 생활을 영위하며 그렇게 산다.

어느 날 난 그녀에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요즘 뭐해 언니’ 하며 전화하면서 이런 것을 물어봤다.

“언닌 맛있는 것을 맨 처음에 먹어? 나중에 먹어?”

“나? 난 맨 나중에 먹어…. 우린 6남매여서 어렸을 적에 김을 한장씩 똑같이 나눠주면 언니 오빠들은 냉큼 먹지만 난 그것을 16등분해 김을 밥에 돌돌 말아 밥뚜껑 위에 놓고 엄마가 사준 예쁜 분홍색 내복으로 갈아입고 마당에서 달 보며 먹었어….” 오호라. 그녀의 대답을 듣자마자 난 당장 부엌으로 가 냉동실에 있는 생김을 꺼내 16등분해 밥을 둘둘 말아 접시에 담은 뒤 운동복을 벗어던지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서 음, 마당이 아닌 베란다에서 달을 보며 우물우물 먹어보았다. 과연… 맛있었다…. 달이 조금 찌그러지고 내가 어른이긴 했어도 말이다.

‘맛있는 것을 맨 나중에 먹는다.’

난 절대로 못할,거 같지만 그런 사람들을 좋아한다.조니 뎁처럼 항상 우물쭈물하지만 결국엔 실행하는 사람들 말이다.그 언니는 조니 뎁과 같은 얼굴로 지금도 멋지게 일선에서 일한다.한순간도 일탈하지 않고 마지막에 맛있는 것을 준비된 자세로 먹는 자의 여유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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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영/ 영화제작소 청년 회원·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