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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장치로 서늘함 자아내는 공포영화 <검은 물밑에서>

죽은 자의 존재증명

살아 있는 것이 일개 사물로 화하는 순간, 곧 죽음의 순간을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거의 본능적이다. 하지만 스크린상에서 진행되는 죽음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즉각 오싹한 공포가 우리에게 엄습해오리라고 가정하는 건 잘못된 것일 터,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나의 죽음이 아닌 타인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공포영화는 그것을 보고 있는 우리가 결코 물리적으로 치명적인 일격을 직접 당하지는 않으리라는 믿음, 이러한 일차적인 믿음이 없다면 성립되지 않는 장르이다(만일 그런 믿음이 없다면 그 누가 영화관을 찾을 것인가). 이때 영화는 타인들의 죽음이 전시될 공간을 무대화하고 그 위에서 펼쳐지는 거대한 죽음의 광경을 볼거리로 만든다. 그리하여 공포영화는 그 과잉과 소비 혹은 낭비라고 하는 즐거운 유희와 함께 심지어 우리에게 웃음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이를테면, 조지 로메로의 <시체들의 새벽>, 샘 레이미의 <이블 데드> 연작, 피터 잭슨의 <데드 얼라이브> 같은 영화들이 그러하다.

거대한 환상, ‘억압된 것들의 귀환’

때로 영화장치를 이용한 심리적 조작을 통해 이러한 믿음의 굳건함을 잠시나마 의심하게 만드는 이들도 있다. 즉 스크린은 더이상 안전한 장벽이 아니라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나카다 히데오의 영화 <링>은 이런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영화였다. 한을 품은 여귀는 텔레비전 모니터상에 재현된 일개 이미지이기를 멈추고 그 바깥으로 서서히 기어나와 사내의 눈앞에 선다. 그러나 공포영화가 두려움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환상이 필요하다. 살아 있는 것이 사물로 화하는 순간이 우리 스스로의 실존적인 체험으로 주어지지 않는 이상 그리 큰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사물을 활성화시켜버리는 것은 어떨까? 여기서 공포영화에서 익숙하게 반복되는, 그러나 결코 단순한 반복이 아닌 변주로서 나타나는 중요한 환상 하나를 떠올릴 수 있겠다. 그건 바로 사물(事物)이 더이상 사물(死物)이기를 멈추는 것이다. 이른바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고도 명명되었던 이 환상은 나카다 히데오의 <검은 물밑에서>을 지탱하는 가장 거대한 환상이기도 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끝은 심히 창대하리라. 그저 낡은 아파트 천장의 물 얼룩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물이 그저 콘크리트의 약한 부분을 뚫고 새어나온 단순한 사물이라고 생각할 관객은 없다. 윤종찬의 <소름>에 나왔던 미금아파트 천장의 그을음, 혹은 클라이브 바커의 <헬레이저>에서 마룻바닥에 떨어졌던 몇 방울의 피, 이들은 점점 활성화되어가고 있는 ‘이미 죽은’, 혹은 ‘죽어 있는’ 것들의 존재증명이다. 그러나 <검은 물밑에서>의 주인공 요시미가 아파트에 처음 방문했을 때, 그녀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공포영화에서 사물들이 점점 생기를 띠게 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결국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은 장본인이 바로 그 사물들 곁으로 찾아온 인물들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인물들 또한 점점 이와 같은 사실을 우리보다는 다소 뒤늦지만 결국은 알아차리게 된다. 물론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그 이유는 그 사물들이 그/그녀로 인해 활성화될 뿐 아니라, 동시에 그/그녀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사물(死物)이 되기를 멈춘 사물(事物)들은 살아 있는 것들을 사물화(死物化)하려 달려든다. <검은 물밑에서>의 아파트를 살아 움직이게 만든 것은 바로 요시미이다. 여기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녀가 2년 전에 죽은 소녀 가와이 미츠코의 혼령이 자신의 딸 이쿠코를 데려가려 한다며 절규할 때, 그것은 기실 그녀의 현실- 이쿠코를 두고 이혼한 남편과 벌이고 있는 양육권 투쟁- 이 환상의 공간에 확대되어 투사된 것에 다름 아니다. 미츠코의 혼령- 아파트가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요시미 그녀 자신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는 미츠코를 그저 아파트라는 공간과 딸 이쿠코 사이의 감응이 만들어낸 일종의 ‘폴터가이스트’로 생각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쩌면 여기까지는 그저 공포영화에서의 ‘사물의 힘’과 그것의 운동을 기술한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하간 나카다 히데오는 그것을 이 장르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밀어붙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아파트 공간 이곳저곳은 생명을 얻은 사물이 터뜨리는 광기어린 움직임으로 인해 점점 빠르게 공포의 공간으로 변해간다. 물을 줄줄 흘리며 금세 터져나오기라도 할 듯 쿵쾅거리는 옥상의 물탱크, 곳곳에서 흐르는 물로 물바다가 되어버린 405호, 그러다 마침내 서서히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틈으로 쏟아져나오는 엄청난 양의 물에 이르기까지.

이 영화에서 엘리베이터 입구를 통해 물이 쏟아져나오는 장면은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에서 거의 그대로 따온 것임이 분명하다. 큐브릭의 <샤이닝>은 공포영화의 형식적 요소들만을 차용하여 이 장르가 순수 형식의 유희를 위한 무대로 기능할 수도 있음을 입증한 바 있지만, 나카다 히데오의 <검은 물밑에서>는 그렇게까지 밀어붙이는 영화는 아니다. 그래서 형식의 유희에 대한 일종의 알리바이와도 같은 서사가 개입한다. 요시미와 그녀의 딸 이쿠코, 그리고 2년 전에 죽은 소녀 미츠코, 이 세 캐릭터는 결국 ‘하나를 위한 삼중주’이다. 그들은 모두 서로간에 문제가 있는 부모들의 자식들로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영화는 간단히 말하자면 이들의 ‘엄마 찾기’, 혹은 ‘엄마 되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엄마 없이 홀로 놀다 옥상의 물탱크에 빠져 죽은 미츠코의 원혼은 마침내 요시미를 차지하게 되고(동시에 요시미는 영원히 곁을 떠나지 않을 딸을 갖게 된 셈이다), 엄마 없이 홀로 자란 이쿠코는 10년 만에 돌아간 아파트에서 엄마의 혼령과 조우한다. 흡사 지난해에 개봉된 영화 <쓰리>에서의 진가신의 에피소드(<고잉 홈>)처럼, <검은 물밑에서>라는 공포영화의 외피를 감싸고 있는 것은 이처럼 ‘애틋한’ 가족드라마이다.

원한, 죽지 않는 몸부림

이와 같은 서사가 일개 장식물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또한 여기서 드러나는 이른바 ‘모성’ 이데올로기를 지적하는 것은 옳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사소한 문제이다. 그 누구도 눈물을 흘리기 위해 공포영화를 보러 가지는 않는다(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덤’에 불과하다). 나카다 히데오는 이 서사를 진심을 다해 공들여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그가 어디까지나 서사적 드라마를 공포효과의 극대화를 위한 형식적 장치로 다루고 있다는 의미에서다. 허풍으로 가득한 특수효과에 의해 서사가 결국 핑곗거리로 밀려나고 마는 최근의 할리우드산 공포영화들과 비교할 때, 이 점은 물론 간과할 수 없는 미덕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요시미가 자신이 끌어안고 있던 아이가 딸 이쿠코가 아닌 미츠코임을 알게 되는 장면 역시 <샤이닝>의 유명한 욕실 시퀀스와 일견 유사하지만, 거기엔 나카다 히데오의 전작 <링2>의 우물장면에서 보여졌던 썩은 몸뚱어리를 지닌 원귀의 이미지가 동시에 겹친다. 큐브릭은 결코 제시하지 않았던 추악하고 두려운 형상의 과거를, 나카다 히데오는 집요하게 드러낸다. 특히 <검은 물밑에서>는 하나의 사물, 아파트라고 하는 거대한 사물에 그보다 훨씬 거대한 감정, 즉 원한이라고 하는 감정을 덧씌운다. 서사가 작동하는 것은 바로 여기서이다. 왜 사물은 그저 죽어 있기를 멈추는가, 라는 물음에 해답을 구하고자 하는 것, 즉 <검은 물밑에서>의 서사는 원한이라는 거대한 감정을 사물의 편으로 실어 나르는 축인 셈이다. 이때 아파트-사물은 몸을 뒤틀고 눈물 흘리며 그 자체 오싹한 공포의 이미지가 된다. 그러나 이 사물은 그토록 거대한 감정을 수용할 만큼의 용적을 지니고 있지 않다. 결국 모든 원한은 틈을 비집고 나와 바깥으로 흘러 넘친다.

지난 세기 빠르게 들어선 새로운 주거공간으로서의 아파트, 그리고 이 공간과 결부된 가족형태의 변화가 <검은 물밑에서>와 같은 공포영화를 가능케 했음은 물론이다. 한때 새로운 주거공간이었던 것은 이제 오래된 기억들의 무덤, 망각된 것들을 위한 비석이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검은 물밑에서>의 아파트는 곧 파괴될 것이고 거기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설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아파트와 무엇보다도 닮아 있는 것은 바로 나카다 히데오의 영화이다. 이런 영화를 보는 것은 흡사 지난 시절 공포영화들의 무덤을 방문하는 것과 같다. 그의 영화는 공포영화 장르의 관습에서 한치도 벗어나 있지 않지만, 이 장르를 구성하는 익숙한 요소들을 가지고 여러 가지 조합을 만든다. 이 장르에 익숙한 이들에게라면 아마 <검은 물밑에서>는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주술처럼 읽힐 것이다. 그리고 각자가 발견한 빨간 가방을 따라 두려움의 여정에 동참하다가 운이 좋다면 마침내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검은 물밑에서>에서 가장 이상한 부분은 결말부에 살짝 달라붙은 ‘십년 뒤’ 에피소드이다. 여기서 어느덧 열다섯이 된 이쿠코는 예전에 어머니와 살던 아파트를 방문했다가 어머니의 혼령을 본다. 이쿠코는 거기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싶다고 말하는데, 그녀의 등 뒤에서는 미츠코의 혼령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중이다. 안타깝게도 모녀는 다시 헤어질 수밖에 없다. 이 부분은 공포영화에서 익숙한 ‘최후의 깜짝 쇼’의 일종이기도 하지만, 정작 문제삼고 싶은 것은 그러한 상투성이 아니라 호러 장르를 다소 벗어나 드라마를 다루는 데 있어 나카다 히데오가 보여주는 안이함이다. 거두절미하고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는 그런 쪽으로는 재능이 없다. 흡사 <링>을 보던 중 갑자기 <유리의 뇌>가 튀어나오는 격이랄까. 활성화된 거대한 사물, 아파트는 어머니의 품으로 치환되고 만다. 간단없을 것만 같던 공포는 여기서 종결된다. 기가 질려 불가해한 대상을 응시하는 대신, 이쿠코는 등 뒤로 솟은 낡은 아파트를 뒤로 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된 미츠코의 원한이 왜 어머니에게로만 향해야 했던가에 대해서는 더이상 묻지 않아도 된다. 그걸 묻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검은 물밑에서>의 상상적인 속편을 머리에 그려보아야 한다.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