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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편의 영화,세편의 에세이 - <무간도> [8]

----------80년대 홍콩누아르의 유산을 고스란히 간직한 <무간도>를 보면서, 추억에 빠져들었다. 엣날의 홍콩누아르 한편이 겹치고 있었다. 임영동의 <용호풍운>. 개봉 당시에는 <미스터 갱>이라는 희한한 제목이었다. 87년에 만들어진 <용호풍운>을 처음 만난 것은 불법 비디오를 통해서였다. <영웅본색>으로 홍콩영화가 한창 뜨고 있을 때, <용호풍운>을 만났다. 여기서도 주윤발과 이수현이 나온다. 그런데 <첩혈쌍웅>과 반대다. 이수현은 범죄자이고, 주윤발은 경찰 스파이다. 범죄조직에 침투한 주윤발은 이수현과 친구가 된다. 혹시 <용호풍운>을 본 적이 없다면,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을 떠올리면 된다. <저수지의 개들>의 인간관계와 기본적인 플롯은 <용호풍운>과 동일하다. 표절이라고? 물론이다. 타란티노는 <용호풍운>과 스탠리 큐브릭의 <킬링> 등에서 인물과 스토리를 따왔다고 이미 밝혔다. 경찰 스파이와 범죄자가 친구가 되고, 함께 범행을 하다가 스파이가 부상을 당한다. 그들은 창고로 도망치고 다른 범죄자들이 스파이라고 의심하지만, 그는 끝까지 믿는다. 진정한 사나이의 의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불변이다. 그 믿음 때문에 자신이 죽어간다 해도, 결코 믿음을 내팽개치지 않는다. <영웅본색>의 소마가 그랬듯이. 그들에게 의리와 명예는 어떤 신보다도 위대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의리’ 때문에 <용호풍운>에 반한 것이 아니다. 주윤발은 경찰의 스파이지만, 사실은 정보원에 가깝다. 제대로 하는 일도 없고 가정도 풍비박산이고 괜히 악독한 형사에게 끌려가 맞기 일쑤다. 나는 그 초라하고, 쓸쓸한 주윤발이 마음에 들었다. 잘나지도 않았고,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부초처럼 떠돌아다니며 근근이 살아가는 인생이. 홍콩누아르는 주로 영웅을 그리지만, <용호풍운>은 낮은 곳에 임하여 널브러진 우리의 일그러진 영웅을 보여준다. 주윤발은 그런 추레한 역도 정말 멋들어지게 연기한다. 어디 하나 마음붙일 곳 없고, 여기저기서 무시당하고 조롱받던 주윤발은 마침내 건수 하나를 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친구를 발견한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단 하나뿐인 친구를. 그렇게 그들은 함께 죽어간다, 친구로서. 새벽의 푸른빛이 썩 어울리는 <용호풍운>은 홍콩누아르의 초기 걸작으로 손꼽을 만하다. 오우삼의 뒤를 이어 할리우드로 진출했던 임영동은 장 클로드 반담의 영화나 만들며 초라해졌지만, <용호풍운> <감옥풍운> <타이거 맨> 등은 그의 진가를 되새기게 해주는 명작이다.

----------<무간도>의 진영인은 <용호풍운>의 주윤발보다는 멋진 인간이다. 인간 냄새가 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오우삼의 <첩혈속집>에서 양조위는 진영인과 비슷한 역을 했다. 범죄조직에 들어가 킬러로 일하는 경찰의 스파이. 그는 고뇌로 가득하고, 비관주의자의 매력으로 가득하지만 그리 친근하지는 않다. <첩혈속집>에서도 양조위와 주윤발은, 직감적으로 서로를 알아보고 친구가 된다. 영웅은 원래 그렇게 서로를 알아보는 법이다. 지음이라든지 솔 메이트라는 말처럼. 하지만 <무간도>의 진영인과 유건명은 그러지 못한다. 그들은 적이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이해할 것이지만, 신뢰할 수는 없다. 비극은 거기에서 출발한다. 피를 뿌리며 싸운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누가 승자가 되고 패자가 되는 문제가 아니다. <첩혈쌍웅>처럼 함께 손을 잡고 싸울 수 있는 거대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진영인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면, 유건명을 고발해야 한다. 유건명을 믿으라고? <무간도>는 <첩혈쌍웅>이 아니다. 그들은 발할라의 영웅이 아니라, 무간 지옥을 걸어가는 범인들이다. 그들은 공감하지만, 너무나 처지가 다르다. 그들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지 오래다. 유건명의 결심 정도로 돌이킬 수 있는 운명이 아니다.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 싸우는, 그리하여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영웅. 80년대 홍콩누아르의 세계와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르게, <무간도>는 암울하다. <무간도>에는 영웅적인 정서가 없다. 그들은 그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어하는, 언제나 흔들리는 보통 사람일 뿐이다. 그건 마치, 과거를 그리워하는 홍콩인의 마음 같다. 불안한 미래이지만, 그 불확정성 때문에 오히려 멋지게 살아갈 수 있었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 좋든 싫든 이제는 살아야 한다. 미래는 예정된 것이다. 진영인과 유건명의 미래는 고정된 것이다. 살아도, 죽어도, 정체가 밝혀져도, 밝혀지지 않아도 유건명이 살아야 할 곳은 무간 지옥뿐이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승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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