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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부는 컸지만,걸작이 되지 못한 <갱스 오브 뉴욕>

엄청 비싼 ’바보짓’

어마어마한 양의 비하인드 스토리들과 함께 1년 늦게 도착한 마틴 스코시스의 <갱스 오브 뉴욕>은 원래 분량이 얼마만큼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엄청난 양을 잘라낸 끝에 165분짜리 영화가 되어 마침내 베들레헴에 당도했다. 19세기 중반 뉴욕시티에 관한 스코시즈의 이 이야기는 분명한 시대착오를 오히려 시대착오적으로 만들어버리는 작품으로서, 요즘 유행이나 분위기와 전혀 무관하게 출현하고서도 당당하며 자신감 넘치는 개인적 서사시다.

오프닝 시퀀스는 한낱 길거리 패싸움을 지고한 경지로까지 끌어올린다. 괴이쩍으리만치 성직자의 풍모를 그대로 풍기는 발론 목사(리암 니슨)와 그의 어린 아들을 따라, 아일랜드 출신 이민민들이 그들의 아지트를 벗어나, 빌 더 부처(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이끄는 토착민 세력과 한판 붙기 위해 흰눈처럼 조용한 로워 맨해튼의 파이브 포인츠로 모여든다. 그들의 무기는 장검과 면도날과 고기 써는 칼과 거의 흡혈귀 수준의 이빨이며, 스코시즈의 무기는 돌리와 크레인이다. 이 살육은 수십개의 잔혹사건들이 도처에서 동시에 펼쳐지고 있는 브뤼겔의 피투성이 캔버스라고나 할까. 마치 지시나 받은 것처럼, 이 대혼란은 목사를 더 좋은 세상으로 떠나보내려고 빌이 난도질을 해댐과 함께 일거에 종료되고, 스코시즈는 작업을 일단락 지은 채 하늘로 올라가 AD 1846년 뉴욕시티의 전경을 공중으로부터 잡아낸다.

대부분을 로마의 널찍한 치네치타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갱스 오브 뉴욕>은 1928년에 나온 허버트 애스버리의 원작에 기반한, 역사에 토대를 둔 판타지다. 이것은 스코시즈가 30년 전부터 만들고자 별러온 영화로서, 그 이유도 자명해 보인다. 사람들이 복닥복닥 우글거리는 빈민가, 바로 이웃한 무시무시한 마피아, 뒷골목 거리의 명예라는 난해한 코드, 이민족이나 이종패거리끼리의 대립, 가톨릭의 허례허식과 구경거리 등은 이 감독이 우리와는 아주 다른, 어떤 또 다른 우주의 역사를 살아왔음을 알려준다.

<갱스 오브 뉴욕>은 1억달러가 넘게 든 프로젝트인데, 그 돈은 영화 여기저기에서 제값을 하고 있다. 지옥의 오렌지빛 불길로 밝혀진 널따란 뉴욕시티 세트는 정말 장관이다. 이 영화에서 제일 볼품없는 것은 바로 각본이다. 세명의 서로 다른 작가들 손을 거쳤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아마도, 프로듀서 하비 웨인스타인의 손까지 거쳤을 게다. 남북전쟁시기로부터 16년을 훌쩍 뛰어넘어 영화는 고아원으로 보내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로 성장한, 암스테르담이라는 바보 같은 이름으로 통하는, 죽은 목사의 아들을 등장시킨다. 자기가 옛날 살던 동네를 찾아가면서 암스테르담은 성경책을 이스트 리버에 던져넣는다. 그는 복수를 위해 고향을 찾은 것이다.

뉴욕을 지배하는 것은 보스 트위드(짐 브로드벤트)지만, 그를 실질적으로 조종하는 것은, 이 지옥도의 진정한 사탄 빌 더 부처다. 무시무시한 수염을 빙글빙글 돌려 꼬며 하늘을 찌를 듯한 모자를 왕관처럼 쓰고 있는 데이루이스는 이 지옥의 왕국을 지배하는 사탄의 황제다. 오이디푸스 같은 무지로 암스테르담을 입양한 그는, 발론 목사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내가 죽인 사람들 중 유일하게 기억해둘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지.”

암스테르담이 빌 더 부처를 이리저리 재느라 시간을 죽이는 사이, 제니 에버딘(카메론 디아즈)과 서로 연정을 느끼게 된다. 솜씨좋은 소매치기에서 프리랜서 창녀까지 몇 가지 직업을 왔다갔다하는 그녀의 배역은, 뭔가 관객에게 암시하면서 감동도 주게끔 만들고자 했지만 결국엔 지나치게 과장돼버렸다는 점에서 디카프리오의 배역과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그들이 서로의 상처를 내보여주는 장면도, 원래는 깊이있는 뭔가를 암시하게끔 고안된 것이었던가보다. 이 젊은 연인들이 등장하는 시간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재미가 없어진다. 빌은 그런 와중에도, 그들의 젊고 아름다운 살을 베어버릴 수 있게 칼날 벼리기를 게을리하지 않지만 말이다.

영화는 암스테르담과 빌 더 부처의 마지막 결투를 위해 힘을 모으는데 이것은 아일랜드의 정치개혁운동 및 1863년의 비극적 폭동과 맞물린다. 뉴욕이 불타오르고 부자들의 집이 약탈되지만 우리의 주인공이 직접적으로 연루되는 것은 아니다. “온 땅이 떨며 흔들리고 있지만 나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러 간다”는 보이스오버가 이를 말해준다. <갱스 오브 뉴욕>에서 이 폭동은 <쿼바디스>에서 로마의 불이나 마찬가지 의미지만, 생략이 심하고 몹시 불완전하다. 스코시스는 거리를 온통 피로 물들이지만 암스텔담과 부처의 마지막 결투는 지나치게 빨리 도래한다. 폭동은 겨우 시작되었을 따름인데 말이다.

무엇보다도, <갱스 오브 뉴욕>은 세르지오 레오네의, 결함 많지만 걸작이 될 뻔도 했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떠올리게 한다. <갱스 오브 뉴욕>의 미장센은 물론 한결 뛰어나지만 구조는 훨씬 더 진부하다. 아니면 원래는 안 그랬는데 만들다보니 진부해져버린 건가? 각본을 다시 쓰고, 다시 촬영하고, 다시 편집하고, 온갖 불만이 난무했다는 소문을 접하고보면, 스코시스와 그 후견인 웨인스타인이 어떤 관계에 놓여 있었을지 아무도 정확히는 알 수 없을 것이라는 짐작이 든다(<버라이어티>는, 스코시스가 웨인스타인을 위해 하워드 휴즈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예정이라고 전했다. 물론 디카프리오도 함께다). 어쨌거나, 빌 더 부처가 카드 테이블에서 상대방의 손을 테이블에 고정시켜놓으려고 칼을 사용하면서 “제발 그 소리 다시 내지 말아줘, 하비”라고 중얼거리는 대목은, 내부의 조크라기보다는 가슴으로부터 울려나오는 절규에 가까운 것 같다.

<갱스 오브 뉴욕>은 돈만 돈대로 잔뜩 쓴 바보짓같이 보인다. 게다가, 어떤 대목은 엉뚱한 긴축으로 인해 생뚱맞아 보이기조차 한다. 이건 마치, 빈털터리로 파산할까 두려워, 우아한 맨션을 팔아치우고 실용성만 강조한 아파트로 이사해 들어앉은 부잣집 가족을 보는 것 같다. <갱스 오브 뉴욕>은 하늘 저 너머까지 닿고자 하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 영화는 스스로의 대단한 포부들에 가려져 오히려 잡아먹혀버렸다. 짐 호버먼/ 영화평론가 <빌리지 보이스>

* (<빌리지 보이스> 2002.12.18. 짐 호버먼은 미국 영화평단에서 대안영화의 옹호자로 가장 명망이 높은 평론가로 <빌리지 보이스>에 기고하고 있습니다. <씨네21>과 <빌리지 보이스>는 기사교류 관계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