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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니콜슨(Jack Nicholson)과 <어바웃 슈미트> [2]

하지만 니콜슨은 제임스 딘이나 말론 브랜도가 50년대 보여준 청춘의 표상과 달랐다. 무엇보다 그는 청춘스타로 시작하지 않았다. <이지 라이더>에 출연할 때 이미 서른이 넘었던 그는 당시에도 앞머리가 상당히 벗겨져 있었고 이마와 눈가에 주름이 뚜렷했다. 어쩌면 니콜슨은 메이저 스튜디오가 앞다투어 모셔갈 빛나는 외모의 소유자가 아니었기에 70년대 급변하는 할리우드에서 대안적 얼굴로 떠오를 수 있었는지 모른다. 당시 할리우드는 스튜디오가 오랫동안 지켜오던 관습적 표현을 거부하고 기존의 가치관에 도전하는 중이었다. 그러자면 배우도 그냥 잘생긴 것으로 부족했다.

<차이나타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반전운동과 히피, 마약과 성혁명의 시대는 반항과 냉소, 허무와 광기를 보여줄 배우를 찾고 있었다. 1974년작 <차이나타운>과 1975년작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그런 면에서 니콜슨의 진정한 출세작이다. <차이나타운>의 탐정 제이크 기티스는 40년대 험프리 보가트가 연기한 탐정 필립 말로우를 모델로 삼은 것이지만 70년대 분위기에 걸맞게 거대한 악의 실체 앞에 무력하다. 진정한 악당은 살아남고 탐정은 여인의 죽음을 막지 못한다. 거대한 허무주의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린 이 영화에서 니콜슨은 속내를 헤아리기 힘든 냉소적인 인물의 이미지를 뚜렷이 심어놓았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맥머피 역시 안티히어로였다. 폭행죄로 5번이나 구속된 전력이 있는 맥머피는 감옥에서 벗어나 정신병원에 들어오지만 거기에서 교도소보다 잔인한 방식으로 사람을 감금하는 시스템을 목격한다. 월드시리즈를 보고 싶다는 단순한 욕망이 좌절되면서 탈출을 꿈꾸던 맥머피는 결국 체제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니콜슨은 여기서 후일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 ‘상어의 미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감옥보다 답답한 병원을, 천사의 복장을 한 악마 같은 간호사를, 도전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병동의 환자들을 조롱하는 그 표정은 당시 사회에 던지는 적의의 표현이다. 크게 웃으면 입가가 위로 올라가는 특유의 미소는 <샤이닝>을 거쳐 <배트맨>의 조커로 이어진다.

절망의 아우라를 표현하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로 첫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타며 정점에 오른 니콜슨은 이후 다소 침체된 시기를 보내지만 <샤이닝>을 필두로 제2의 전성기를 맞는다. <레즈>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애정의 조건> <프리지스 오너> 등이 이어진 80년대 중반까지 니콜슨은 70년대 안티히어로의 모습에서 벗어나 다양한 영역에서 원숙한 연기를 보여준다. 스탠리 큐브릭의 1980년작 <샤이닝>은 니콜슨이 70년대 쌓아올린 냉소와 분노의 이미지를 광기의 영역으로 옮겨놓은 작품이다. 고립된 호텔에서 서서히 미쳐가는 인물 잭 토랜스는 순전히 니콜슨의 연기로 만든 것이건만 어떤 특수효과도 흉내낼 수 없는 무시무시한 살인마다. 중년에 접어든 니콜슨에게 새로운 전기가 된 <샤이닝> 이후 그는 왕년의 친구 워런 비티과 손잡고 <레즈>를, 밥 라펠슨과 함께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를 만들었다. 이중 라나 터너가 나왔던 동명영화를 리메이크한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는 정력적인 남성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80년대 가장 도발적인 섹스신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빵을 반죽하는 탁자 위에서 벌어지는 성애장면은 <애정의 조건> <이스트윅의 악녀들> 등으로 연결되는 거친 남성으로서 니콜슨의 성적 매력을 부풀려갔다. 여기엔 니콜슨의 실제 생활도 겹쳐진다. 워런 비티와 더불어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두명의 호색한으로 꼽히는 니콜슨은 최근 인터뷰에서도 “예전엔 하루라도 여자 없이 잠들 수 없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1962년 배우 샌드라 나이트와 결혼해 낳은 딸과 1990년 안젤리카 휴스턴과 연애하던 중에 또 다른 배우 레베카 브루사드를 임신시켜 낳은 딸, 이후 태어난 아들이 있는 걸로 알려져 있지만 다른 여자가 낳은 자식도 꽤 있다고 한다. 젊은 시절부터 청교도적인 엄숙함과 거리가 멀었지만 니콜슨의 이런 요란한 사생활은 그를 일부일처제를 지키는 가부장의 모습과 어느 정도 동떨어지게 만들었다. 차라리 <이스트윅의 악녀들>의 음탕한 악마가 훨씬 어울린다.

80년대로부터 90년대로 넘어가는 동안 니콜슨은 <배트맨>(1989)의 조커와 <어 퓨 굿 맨>(1992)의 제셉 대령으로 스크린에 묵직한 존재감을 남기는 악역을 연기했다. 실제로 그가 선보인 악당은 교활하고 잔인하지만 묘한 동정심을 자아낸다. 조커의 웃음이 전하는 아이러니를 생각해보라. 웃으면서 살인하고, 웃으면서 화를 내며, 웃으면서 슬퍼한다. 그의 미소는 즐거움의 표현이 아니다. 끔찍한 사고가 만든 흉터일 뿐이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니콜슨의 웃음이 좌절과 조롱의 표현이었던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어바웃 슈미트>의 감독 알렉산더 페인은 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니콜슨의 영화들에는 깊은 절망의 아우라가 있다. 긍정적인 가능성으로 채워져 있건만 니콜슨의 세계는 삭막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가 맡은 캐릭터들은 안전하게 빗장을 채울 기회를 갖지 못한 인물들이다.” 숀 펜이 연출한 <플레지>(2001)의 주인공 제리 블랙은 페인의 정의에 부합한다. 정년퇴임을 한 경찰이 유아살해범을 잡기 위해 병적으로 집착하는 과정을 다룬 이 영화에서 니콜슨은 지키지 않아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을 맹세를 지키기 위해 수렁으로 빠져드는 인물로 등장했다. 그에게 두 번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선사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1997)의 멜빈 유달 역시 강박적인 성격의 인물이다. 온갖 더러움으로 오염된 바깥 세상과 담쌓고 지내기 위해 문 잠그는 걸 다섯번씩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인물, 멜빈 유달은 스크루볼코미디의 세계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다. 이웃에 사는 사람조차 경멸하는 인간이 관객의 호감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 여러 가지 차이를 무마하고 화해시키는 게 스크루볼코미디의 운명이지만, 멜빈 유달 같은 병적 인간에게 매력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은 분명 니콜슨이기에 가능했다. 뛰어난 주방장이 그러하듯 그는 같은 재료를 다른 방식으로 조합해 전에 본 적 없는 요리를 내놓았다.

늙은이 슈미트, 영리한 니콜슨

다시 <어바웃 슈미트>로 돌아와서 그를 들여다보면 니콜슨 스스로 ‘언-잭’(un-Jack)이라고 부른 것이 무엇인지 명확해진다. 이 영화에서 슈미트는 니콜슨의 냉소와 분노, 광기와 성적 매력을 지워버린다. 니콜슨의 슈미트라면 고함을 지르고 음흉한 미소를 지어야 할 순간에 넋이 나간 표정을 지으며 제 몸 하나 지탱 못하는 무기력함을 내비친다. 나이를 먹어도 생의 활기와 리비도를 주체 못하던 니콜슨을 대신해 여자의 유혹에 쩔쩔매는 소심한 늙은이 슈미트가 거기 있는 것이다. 관객이 그런 슈미트를 보며 킬킬댈 수 있는 것, 그렇게 웃으면서도 죄책감이 들지 않는 것은 슈미트를 맡은 배우가 니콜슨이기 때문이다.

영리한 영화 <어바웃 슈미트>는 니콜슨과 슈미트 사이에서 일종의 서스펜스를 만든다. 관객이 익히 아는 니콜슨이 튀어나올 법한 위기에서 니콜슨은 슈미트의 얼굴로 숨어버리고, 자연인 슈미트라면 지켜보기 힘들었을 고통스런 추락이 배우 니콜슨이기에 코미디로 변한다. 그리하여 <어바웃 슈미트>는 슈미트가 자신이 의지했던 모든 것을 하나둘 잃어가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인 동시에 니콜슨이 자신이 쌓아온 이미지를 하나둘 배반하는 코미디이다. “불쌍한 사람, 당신은 속에 뭔가 숨기고 있군요…. 그건 분노 같아요”라는 극중 대사가 극중 인물 슈미트를 향한 것인데도 배우 니콜슨에게 하는 말로 들리는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의미심장하게도 니콜슨의 다음 영화는 애덤 샌들러와 출연한 <분노 다스리기>(Anger Management)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광기와 분노를 숨기는 것만으로 코미디를, 경탄을 끌어낼 수 있는 배우라면. 반역의 얼굴, 니콜슨을 잉태한 70년대가 오래 전에 끝났지만, 현명한 배우, 니콜슨의 시대는 지금 막 세 번째 막을 열어젖히고 있다. 글 남동철 namdong@hani.co.kr 사진제공 뉴라인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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