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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니콜슨(Jack Nicholson)과 <어바웃 슈미트> [1]

이 사람잡는 노인네 같으니!

허무와 광기의 아이콘 잭 니콜슨,그의 `영리한` 만년송가 <어바웃 슈미트>

여기 초점이 풀린 멍한 눈으로 시계만 쳐다보는 남자가 있다. 시계바늘이 5시를 가리키면 그는 평생 직장이던 보험회사를 나가게 된다. 그의 이름은 워런 슈미트. 몇 가지 정보만 있으면 손쉽게 고객의 기대수명을 계산할 수 있는 오랜 경험의 소유자이며, 직장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한번도 의심한 적 없는 인물, 정년퇴임을 하고나서도 일류대 경영학 석사 출신 후임자가 자신에게 도와달라고 말하길 바라는 노인, 42년간 한 여인과 살면서 그녀가 없는 삶이 어떠하리라는 건 상상조차 안 해본 사내, 그가 지금부터 맞게 될 상황은 절체절명의 위기다. 하릴없는 삶에 채 무료해질 틈도 없이 슈미트의 집에서 무언가 무너지는듯 ‘쾅’ 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내가 뇌졸중으로 급사한 것이다. 갑자기, 그가 알던 세상이 작별을 고한다. 알 수 없는 저편으로 멀어져간다. 미처 철들기 전에 고아가 된 노인, 그는 과연 새로운 인생에 적응할 수 있을 것인가?

버스터 키튼처럼, 무성코미디처럼

잭 니콜슨을 생애 12번째 오스카 후보에 올려놓은 <어바웃 슈미트>는 포스터부터 니콜슨의 기존 이미지를 뒤집어놓은 영화다. 훤한 대머리에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마저 헝클어트린 살찐 니콜슨의 얼굴, 거기엔 대배우다운 카리스마가 보이지 않는다. 시사주간지 <타임>이 ‘상어의 미소’(shark’s grin)라 일컬은 <배트맨>의 악당 조커의 스마일은 물론이려니와 고양이를 닮은 눈동자의 표정, 이마를 밀어올리는 눈썹의 움직임도 만날 수 없다. 대신 그는 그냥 아무 생각없는 얼굴을 유지한다. 인생의 목표도, 사랑할 대상도, 의지할 친구도 다 떠난 현실을, 그는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다.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지점은 여기부터다. 그는 자기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 무얼 뜻하는지 모른다. 어디에서 무얼 찾아야 하는지 모른다. 말하자면 슈미트는 일종의 술래다. 술래가 헤매고 있는 동안 그걸 지켜보는 참가자들은 웃지 않을 수 없다. 니콜슨은 자신이 술래의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굳이 오스카 후보로 오르지 않았더라도 <어바웃 슈미트>의 니콜슨에게 감탄하게 되는 대목은 그가 캐릭터와 자신 사이에 미묘한 균형을 잡는 줄타기를 기막히게 한다는 점이다. 극중 슈미트가 탄자니아의 소년 엔두구에게 보내는 첫 편지를 쓰는 장면은 대표적이다. 인자한 아저씨 같은 표정의 슈미트가 편지에서 회사 후임자와 아내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는 순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보여준 것 같은 니콜슨 특유의 일상적 분노가 돌연 터져나온다. 그건 마치 장례식장의 폭소처럼 어울리지 않지만, 느닷없는 것이기에 웃음은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이 된다. 니콜슨은 <어바웃 슈미트>로 올해 골든글로브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을 받으면서 “난 코미디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드라마 부문 상을 받다니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게 아닌가요”라며 농담 같은 수상소감을 밝혔는데, 실은 진담이다.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바웃 슈미트>를 무성코미디로 여겼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 번 내가 버스터 키튼이 되어 세트장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그러니까 니콜슨에 대한 새삼스런 찬사는 그가 가공의 인물 슈미트를 똑같이 흉내낸다는 점에 있는 게 아니다. 평론가 로저 에버트가 지적한 대로 “니콜슨이 슈미트랑 너무 다른 사람이어서 그의 연기가 어떤 경외감을 자아내는 것”이다. “슈미트는 다른 사람이 했으면 지나치게 비극적이거나 수동적이거나 아무것도 아니었을 캐릭터이다. 하지만 니콜슨은 어떻게든 슈미트 안에서 생이 거의 끝나갈 무렵 천천히 발전하는 갈증, 삶을 시작하려는 욕망을 발견한다.” 이걸 ‘잭 니콜슨의 연기변신’이라고 단순화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벗어난 말일 것이다. 니콜슨은 “연기의 85%는 배우가 원래 갖고 있던 것에서 나오며 배역에 맞게 바뀔 수 있는 부분은 15% 정도”라고 말하곤 했는데 <어바웃 슈미트>도 예외는 아니다. 니콜슨이 연기하는 슈미트는 딸의 결혼식을 가는 도중 트레일러를 타고 짧은 여행을 한다. 이것은 니콜슨의 첫 메이저 히트작 <이지 라이더>에서 보여준 미지의 땅을 향한 젊은이의 여정과 대구를 이룬다. 마약에 찌든 젊은 변호사로 등장했던 1969년작 <이지 라이더>의 니콜슨이 33년 뒤 생의 막바지에 궁지에 몰린 늙은이로 다시 교차로에 서 있다. 저항과 분노의 계절에 안티히어로의 모습으로 등장한 그를 기억한다면 <어바웃 슈미트>의 니콜슨에게 특별한 감회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이즈음에서 <어바웃 슈미트>는 니콜슨의 ‘입신’의 경지에 오른 15%를 보여주는 동시에 나머지 85%의 니콜슨이 궁금해지는 영화가 된다.

<뻐뿌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

<샤이닝>

허무와 광기의 얼굴

니콜슨은 <이지 라이더>로 갑자기 주류 영화계의 눈길을 모았지만 쉽게 스타가 된 배우는 아니다. MGM영화사 만화 부서의 사환으로 시작한 그는 B급영화의 대부 로저 코먼에게 발탁되어 영화배우를 시작했다. 첫 영화 <크라이 베이비 킬러>(1958) 이후 피터 로레와 함께 나온 <레이븐>(1963), 보리스 카를로프(<프랑켄슈타인>을 연기한 그 배우)와 대결을 벌인 <테러>(1963) 등 로저 코먼의 영화에 연이어 출연한 그는 B급영화의 한계에 절망하며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제작을 하는 등 폭넓은 대중과 만나기 위한 활로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이지 라이더>의 변호사 역도 원래 니콜슨의 것이 아니었다. 립 톤이라는 배우가 캐스팅됐으나 그가 <이지 라이더>의 연출자이자 배우인 데니스 호퍼와 크게 다투며 도중하차해 니콜슨이 맡게 됐다. 피터 피스킨드가 쓴 <할리우드 문화혁명>을 보면 <이지 라이더>의 제작현장은 마약굴 같았다. 그러나 마약을 상용하면서도 니콜슨은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지 라이더>는 니콜슨이 처음 아카데미 후보에 오른 영화였다. 뒤이어 나온 밥 라펠슨 감독의 <파이브 이지 피시스>(1970)에서 니콜슨은 음악가 집안을 뛰쳐나와 유정에서 일하는 노동자 바비 듀피아로 등장했다. 중산층 가정에서 곱게 자란 젊은이의 이유없는 반항을 그린 이 영화는 당시 관객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주인공 바비는 손만 뻗으면 쥘 수 있는 행복의 조건을 갖고 있지만 그 속에 안주하며 아버지처럼 살기를 거부한다. 유복한 계급과 고상한 취향에 환멸을 느끼던 당시 분위기에서 니콜슨이 보여준 삐딱한 태도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파이브 이지 피시스>는 <이지 라이더>와 더불어 청년 니콜슨의 대표작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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