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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행제로>의 `별난 형제` 작가 이해영,이해준 이야기 [2]
이영진 2003-03-07

1년 넘게 ‘언더’에서 활동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작가되기 쉽지만 또한 ‘작가’되기 어렵다”는 현실. 제작사 타이틀을 내건 신생 영화사들까지 영화사는 수백여개, 하지만 정작 1년에 선보이는 영화는 고작 50여편에 불과한 상황에서 “100고까지 쓴다고 해도 제작비에 전혀 차질을 주지 않는” 작가 지망생이야말로 소모품 그 자체였다. 일선에서 떨었던 이들은 일단 충무로에서 후퇴를 선언한다. 해영은 영화제작사 이스트필름 기획실에 입사했고, 해준은 한때 운영했던 안암동의 한 커피숍으로 돌아간다. 대신 해준의 일터를 아지트 삼아 밤새 아이템 회의를 하다 2∼3시간 눈붙이고 나서 해뜨면 각자의 일터로 떠나는 주경야독의 시기였다. 도중 <퇴마록>의 각색을 맡기 위해 마케팅 기획서까지 포함한 시나리오를 첨부했지만, 제작사로부터 아무런 이유도 듣지 못하고 3분 만에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러기를 1년여. 이들은 <반칙왕>의 프로듀서였던 이미연 감독의 소개로 봄 영화사를 소개받는다. 당시 해영은 <박하사탕> 현장에서 피로누적으로 촬영팀이 철수한 줄도 모르고 잠드는 일이 빈번할 정도로 그로키 상태였고, 해준 또한 안암동에서 가뜩이나 터가 안 좋은 커피숍을 운영하느라 부채누적에 짓눌려 있었다. 어떻게든 탈출구가 필요했던 시점에서 전속 작가 제의는 “꿩 먹고 알 먹는” 절호의 찬스였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해왔던 자신들의 방식까지 포기할 순 없었다. “우리 하던 대로 하게 해달라”, “출퇴근은 죽어도 못한다”, “다른 시나리오 모니터 같은 일은 맡기지 말라” 등 올챙이 작가 지망생들이 줄줄이 내건 요구조건을 오정완 대표가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어찌 됐을까.

어쨌든 김영호 감독이 기획하고 두 파트너가 초고를 쓴 <신라의 달밤>은 이들이 그토록 얻고 싶어했던 작가라는 딱지를 안겼지만, 작업 내내 고민 또한 남겼다. 하긴 바깥에서 남의 것 쳐다볼 때와 달리 둥지라는 것은 막상 제 것을 틀고난 뒤에서야 허술하고 부실한 구석이 감지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7고까지 쓰면서 이들은 “아기자기한 대사에 재밌는 사건들의 조합”만으로는 “완성도를 보증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사건 전개상 굳이 보여줄 필요가 없는 장면이라도 캐릭터의 분위기를 강화하고 플롯의 긴장도를 더할 수 있다는 것을 체감한 것이다. 주위에선 “그렇게 자잘한 데 신경쓰면 큰 것 못 쓴다”고 말렸지만, 이들은 고집을 밀고 나갔다.

영 캐스팅 때문에 감독이 바뀌고 다른 제작사로 넘어가게 되고. 서운함이 남죠.

준 그거야 동물적이고 즉자적인 본능이죠. 뭐.

영 뺏어갔다고 할 수도 없고. 최종 시나리오도 우리 것과 많이 다르니까. 그런 건 떨쳐야죠.

준 아무래도 그때는 니네 작품 어떻게 됐냐고 여기저기서 물어와서 곤혹스러워했던 거라고 봐야죠.

<신라의 달밤>을 떠나보낸 허전함 때문이었을까. 이후 둘은 멜로영화 <피아노>의 각색을 맡았지만 진도가 영 신통치 않았다. “시놉시스만 듣고서 울었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지만, 막힌 부분을 끝끝내 뚫지 못했다. “제작사에서 원하는 느낌이 뭔지는 알겠는데 정작 그런 분위기를 못 냈던 거죠”, “잘할 수 없는 작품이니 뒤로 물러나야겠다”는 판단이 서서히 확고해질 무렵 만난 작품이 김지운 감독의 <커밍아웃>. “니네, 요즘 뭐 하니?”라고 묻더니만, <흡혈귀 누나의 고백>이라는 원작을 던져주고서 “재밌으면 한번 해볼래?”라는 김지운 감독의 쿨한 제의에 “색다른 장르를 해보고 싶었던” 이들은 경쟁적으로 서로 다른 버전을 동시에 써내면서 원기를 회복했다.

캐릭터를 빚어내는 데 재능있는 키스톤 콤비라는 소문이 퍼졌고, 충무로 제작사들로부터 제의가 쏟아졌던 것도 이 무렵. 한때 한석규가 출연한다는 말이 돌았던 , 임필성 감독의 <남극일기> 등의 각색작업에 참여했고, 뒤이어 <품행제로>의 시나리오를 맡았다. <명랑만화와 권법소년>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던 조근식 감독과 정진완, 이지형 작가가 함께 만들어놓은 골조에 이들은 “80년대라는 시대적 분위기가 좀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도료를 첨가했다. 조무래기들이 나누는 영웅담의 허와 실을 끼워넣어 결국 원치 않은 싸움으로 몰리게 되는 중필의 상황을 부각했고, 마돈나와 신디 로퍼의 대결구도를 스잔과 경아로 되바꾸어 좀더 친숙한 설정으로 바꾸었다. 중필을 목표없이 ‘어슬렁거리는’ 청춘으로 묘사한 다음, <품행제로>라는 제목을 제안한 것도 이들의 공이다.

영 아직 멀었죠. 벤츠 타는 시나리오 작가가 나와야 하는데.

준 벤츠 타고 싶다고? 하긴 그래야 작가는 언제나 대체가능하다는 관행이 없어지지.

영 관행이 현장까지 간다니까. 현장에서 설정이 바뀌면 작가에게 통보 정도는 해줘야지.

준 하긴 작가영화나 상업영화나 현장시스템은 똑같으니까.

“시나리오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정작 시나리오 작가에 대한 배려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는 두 사람. 해영은 2000년 봄에 마련한 홈페이지(http://ceejak.com)에 3년 가까이 해준과 함께 글을 올리고 있다. 처음엔 “작가들도 말할 수 있는 통로 하나쯤 갖고 있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전문 시나리오 사이트를 꾸리려고 했으나 아이템을 공유하는 일이 쉽지 않아 현재는 자신들이 지금까지 작업한 시나리오를 버전별로 공개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중 쾌변노트에 올려놓은 15편의 글은 작가대접을 해주지 않는 한국영화의 현실에 대한 불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나리오를 쓰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전해주는 자그마한 조언을 담아놓았다. “다들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써서 감독 데뷔하겠다는 기형적인 구조를 이해 못할 바 아니죠. 현실이 이런데.”

두 사람 모두 그렇다고 감독 데뷔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최종 목표로 감독을 설정해두는 케이스와는 다르다. “글쓰다가 제작부로 참여할 수도 있고, 기획을 하고 싶어할 수도 있죠. 감독이야 이것만큼은 우리가 잘할 수 있겠다 싶은 것을 기회가 주어진다면 하는 것일 뿐이에요. 영화라는 게 다 같이 만드는 일이고, 감독은 수많은 영역 중 하나 이상은 아니죠.” 얼마 전 류승완 감독의 <마루치 아라치> 각색작업에 잠깐 참여했던 이들은 하마터면 사장될 뻔했던 첫 번째 공동작업 이 우리영화의 김재원 대표와 이야기를 매끄럽게 만들어준 김지혜 작가의 도움으로 <안녕, UFO>라는 날개를 달고서 영화화된다는 사실에 고무된 상태. 이어 KM컬쳐가 제작하는 공포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으면서, 동시에 김용균 감독과의 작업이 하고 싶어 고민 끝에 청년필름의 <백조와 백수> 각색작업에 참여하겠다는 약속을 한 두 사람은 당분간 햇빛을 못 본 채 아파트에 갇혀 있어야 하는 신세지만, “쓰고 싶은 시나리오를 미친 듯이 쓸 수 있는 환경만 주어진다면 그쯤 대수냐”는 표정이었다. 글 이영진 anti@hani.co.kr·사진 조석환 sky010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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