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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행제로>의 `별난 형제` 작가 이해영,이해준 이야기 [1]
이영진 2003-03-07

이해영과 이해준은 ‘별난’ 형제다. 피를 나눈 적 없으니 얼굴도, 성격도 딴판이다. 그렇담, 이들을 맺어준 삼신 할매는 누굴까. 대학시절, 전업 작가를 꿈꾸며 도원결의 했지만 다들 권하는 배양 코스 대신 서로에게 자양분을 나눠가며 시나리오 작업에 매달린 지 10년. 제작사들을 돌아다니며 문전걸식하던, 영화가 낳은 이란성 쌍동이 형제는 이제 충무로에서 주목받는 젊은 시나리오 작가가 됐다.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얼굴을 텄다는 이들 형제가, 함께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까지, 털어놓은 진실 혹은 대담. - 편집자

(해)영 이름이 비슷해서 형제냐고 그러죠.

(해)준 사귄다는 말도 있어.

영 워낙 붙어다니니까. 기분은 별로지만 그 정도는 참아야지.

준 근데 ‘형제인데 서로 사귄다’는 소문은 또 뭐야. 그건 너무 가혹해.

이해영과 이해준. 스물아홉 동갑내기다. 1년 전부터 분당에 조그만 아파트를 얻어 함께 살고 있다. 비슷한 이름에다 동거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형제 혹은 남매, 심지어 연인이라는 오해를 사곤 한다. 하지만 이들에겐 별로 새로울 것도 없다. 1992년, 서울예대 광고창작과에 입학한 뒤로 10년 넘게 들어왔던 말들이다. 오히려 “이름이 아니었다면 처음에 서로에게 관심이나 가졌겠느냐”고 웃어넘길 정도가 됐다. 시나리오라는 공동의 구애대상을 발견하기까지, 협력해서 수십 차례의 프로포즈를 하기까지, 이들의 이름은 둘 사이에 꽤나 끈끈한 접착제 역할을 했다.

영 입학식 날 불리는 이름이 비슷해서 눈여겨봤는데. 뭐, 저런 놈이 다 있나 싶었죠. 어깨에 뽕들어간 검은색 가죽잠바에, ‘빽바지’ 입고. 거기다 머리는 한참 길러서.

준 그때가 1992년이었음을 감안해줘요. 사실 나보단 니 음흉한 눈빛이 더했지. 특히 이성을 훑어보는 듯한 기분 나쁜 눈빛.

영 어쨌든. 인사하면서 친근감을 더하려고 제 사촌형 이름이 해준이라고 했는데.

준 오히려 무서웠죠. 우리 친형 이름이 해영이었으니까.

영 놀라운 건 아버지 성함도 돌림자가 같아요.

준 더이상 묻지 마세요. 저희도 모르는 집안의 비밀이 있나 싶어 더 안 물어봤어요.

공포영화를 즐겨봤고, 만화에 심취했으며, 무엇보다 전공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서로 알아차리기까지 입학 뒤 한 학기면 충분했다. 친한 친구 둘을 끌어들여 ‘칸채우기’라는 4인조 지하서클을 조직한 것도 이 무렵. 한 대기업이 주최한 대학생 광고대상 공모에서 팀을 이뤄 입선한 여세를 몰아 “뭔가 해보자”고 의기투합했다. 유년 시절 “교과서에 낙서한” 것이 고작이었던 이들은 이때부터 “만화책 만드는 재미”로 따분한 대학생활을 버텨나가기 시작한다. “제품의 컨셉을 염두에 둬야 하는 한계많은 광고 작업”에 싫증난 이들에게 “매번 기찬 아이디어를 내서 칸채우는 데 골몰하는” 일은 즐겁기 그지없었다.

놀이터나 다름없던 동아리가 해체 위기에 빠진 것은 해영이 입대하면서부터. “이쯤에서 시나리오를 한번 써보자”고 했던 해영이 훈련소로 직행하면서 이들의 꿈은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좌초될 운명에 처했지만, 해영의 제안을 받아든 해준은 끈질겼다. 아직 노란 견장을 떼지도 못한 어리버리 이등병 해영을 면회가서 “편지로라도 아이템을 주고받자”는 지령을 전한 것. 이들의 습작 활동은 8개월 뒤, 해준이 강원도 고성으로 입대한 다음부터선 군사우편으로 계속됐다. 해영은 우편물을 다루는 전령이라는 보직을 이용하여 둘만의 서신을 무조건 빠른 우편으로 처리했고, 행정병인 해준 역시 “애인한테 또 편지왔다”는 사정 모르는 고참의 부러움을 뒤로 하고 업무 중에 답장 쓰기에 바빴다.

그러나 “아이디어를 내보여서 자랑하고 싶은” 마음만으로 시나리오가 완성되진 않는 법. 내용이나 전달 속도가 양에 안 찼던 이들은 급기야 휴가 때마다 상대를 면회한 뒤 형이라고 속이고 외박을 따냈고, 번갈아 강원도와 경기도의 여관에 투숙해가며 더딘 시나리오 작업을 해나간다. 2년 동안 둘만의 밀회가 낳은 것은 <아뭏든 탈출>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 “세상에서 버림받은 낙오자들이 감옥에 들어가기 위해 애쓴다”는 줄거리의 시나리오를 완성했지만, 해영은 제대하던 날 해준의 허락하에 “손으로 꼭꼭 눌러쓴” 첫 번째 결과물을 미련없이 폐기처분한다. “누가 봐도 습작이라는 걸 알 정도였어요. 후일을 도모하려면 없애는 것이 좋겠다 싶었을 만큼.”

영 야메로 배운 셈이죠.

준 그렇지. 우린 B짜지, 뭐.

영 교육원 같은 곳에 다닐 생각을 해본 적은 없으니까.

준 그것보다 좀비 시리즈 돌려보는 게 훨씬 낫지.

영 (…)좀비는 너무 느려서 안 무서워. 그런 거보다 아예 사람 짓뭉개는 <지옥인간> 같은 게 훨씬 낫지.

준 무슨 소리. 좀비는 떼로 몰려들잖아. 그게 얼마나 사람 겁주는데.

대부분 그렇듯, 시작은 눈물이었다. 1996년 8월. 해영과 해준은 <투캅스3> 공모전에 응모했지만 미역국을 먹는다. “전편을 패러디하라”는 설정을 받아들었을 때만 해도 둘은 예상한 시제를 받아든 패기만만한 초야의 선비 같았다. 극중 박중훈과 김보성이 누명을 쓴 뒤 경찰에 쫓기고, 결국 경찰과 대치하는 상황까지 맞닥뜨린다는 줄기를 마련하고 시나리오를 쓰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주일. “이보다 더이상 좋을 순 없다”는 자기 최면까지 불어넣은 다음 제작사에 시나리오를 보냈지만 “같이 일해보자”는 연락은 끝끝내 오지 않았다.

주어진 등용문을 통과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풀이 죽어 나자빠질 순 없는 일. 이즈음 이들이 꺼내든 것은 ‘발품’ 전략이었다. 보따리장수처럼 제작사를 돌아다니며 일대일 대면을 시도하기로 결심한 것. 그렇다고 달랑 시나리오 한편 들이대고서 ‘죽이는’ 프로젝트라고 우기는 막무가내식 전술은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충무로 제작자들의 까다로운 입맛을 만족시키려면 좌판을 벌일 수 있을 만큼의 다양한 실탄이 필요했다고 판단했다. 당시에는 머릿속이 아이디어로 넘쳐나던 왕성한 시기라 3∼4일에 시놉시스를, 2주일이면 한편씩 시나리오를 써낼 수 있었고, 그걸 밑천삼아 이들은 제작사 문턱이 닳도록 넘고 또 넘었다.

무명의 작가 지망생들에게 기회를 준 곳은 영화홍보사 래핑보아. “함박눈이 쏟아지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서울의 밤거리에서 재회한 두 남녀. 그리고 이들의 머리 위를 지나가는 거대한 UFO 편대”라는 의 두줄 시놉시스에 관심을 보였다. 한때 해준이 다녔던 이벤트 회사가 래핑보아쪽과 손잡고 영화제작에 뜻을 두고 있던 때였고, 그때 맺었던 가느다란 인연의 기억을 들이대며 노크한 것이 돌파구를 찾았던 것. 제작사로부터 장편 시나리오 주문을 따낸 뒤 7개월 동안 이들은 한달 간격으로 새 버전의 시나리오를 써낸다. 하지만 옴니버스 형식의 멜로영화는 결국 제작사 사정으로 영화화되지 못한다.

영 배고픈 시절이었죠.

준 지금도 배고픈데….

영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써서 영화화되기가 힘드니까. 한때 각색 전문 작가라는 홍보용 찌라시를 만들었다니까요.

준 일종의 틈새시장 공략이라고 할 수 있죠.

영 ‘시나리오 119’라는 이름까지 붙이고서, 맘에 들지 않으면 작업비 받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준 정작 출동은 안 했잖아. 너무 배고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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