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48권의 책으로 읽는 감독의 길 -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한다. [10]
홍성남(평론가) 2003-03-07

리얼리즘-본 대로, 판타지-느낀 대로

<펠리니>

전후에 페데리코 펠리니는 동료들과 함께 미국인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주는 상점인 ‘퍼니 페이스 숍’(Funny Face Shop)을 열었다. 어느 날 이 상점에 로베르토 로셀리니라는 영화감독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로셀리니는 파시스트에 살해당한 신부의 일대기를 그린 단편영화를 만들 생각을 갖고 있었고 이 영화에 알도 파브리치라는 배우를 쓰고 싶어했다. 마침 펠리니가 파브리치와 알고 지내던 사이였기에 로셀리니는 자기 영화에 이 배우를 출연하게 있게 설득해줄 수 없겠느냐고 펠리니에게 부탁하러왔던 것이었다. 이게 계기가 되어 펠리니는 나중에 네오리얼리즘의 걸작으로 남을 로셀리니의 영화 <무방비 도시>(1945)와 <전화의 저편>(1946)에 조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로서 참여하게 된다.

펠리니와 로셀리니의 만남은, 펠리니의 작품 세계에 대해 어느 정도 들어본 사람이라면 사실 의외의 일로 다가올 만한 것이다. 펠리니라면 자신은 리얼리티와 상상 사이의 경계를 긋지 않는다며 리얼리즘이란 단어는 좋은 게 아니라고 말하던 사람이 아니던가 말이다. 그처럼 엄밀한 의미의 리얼리스트는 결코 아니었음에도 펠리니는 로셀리니와의 만남이 자신의 영화세계에서 결정적인 한 사건이었다고 술회한다. 지난 시대의 허위적이고 기만적인 영화에 반대해 자신의 카메라에 현실을 기꺼이 담으려던 로셀리니에게는 당연히 과거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의 영화 제작방식이 요구되었다. 그것은 스튜디오 안에서 미리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찍는 게 아니라 실제 로케이션에서 환경에 적극적으로 반응해가며 작업하는 것이기에 장애물들과 함께하는 일종의 ‘모험’이었다. 펠리니는 이 모험에 도취되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맞는 표현의 매체를 발견해냈다.

미하엘 퇴테베르크 지음 | 김무규 옮김 | 한길사 펴냄

펠리니는 로셀리니에게서 미리 많은 계획을 세우지 말고 카메라의 복잡함에 억눌리지 않으면서 자기가 느끼는 대로의 삶 자체를 영화로 만들라는 것을 배웠다. 달리 말해 그건 영화의 촬영과정이란 시나리오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영화감독의 창의력과 영감에 의존해야만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로셀리니를 따라서 펠리니는 친구들과 피크닉을 떠난다는 마음을 갖고 영화제작에 나섰다. 이 피크닉에서 시나리오란 “정성껏 싼 ‘짐꾸러미’에 불과했다”. 그렇게 떠난 여정은 귀착지가 정해져 있지 않은 모험이었지만 그건 고단한 모험이라기보다는 영감을 분출할 수 있는 모험이었다. 펠리니의 말에 따르면 “영화제작은 미리 생각했던 것에 현실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고, 일어날 여러 가지 일들에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것이다.” 펠리니는 영화 만들기라는 호기심 어린 모험에다가 상상력과 영감, 꿈 등을 마음껏 불어넣으면서 분방한 상상력을 가진 어릿광대, 마술사, 설교사 등을 자처하며 그 여정을 이어갔다. 그렇게 해서 펠리니가 축조해낸 것은 상상의 세계와 자전적 세계가 거의 무질서하게 보일 정도로 뒤얽힌 세계였는데, 그건 불빛을 번쩍이며 흥청대는 서커스, 버라이어티쇼, 시장에 근접한 어떤 세계였다.

결국 펠리니가 걸어간 여정은 이 책 <펠리니>가 증언하듯 로셀리니의 것에서 출발해 자신만의 것으로 돌아오는 어떤 것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진 예술가로서 자신의 마땅한 권리를 끝까지 누리려 했고 또 자기가 곧 영화라고 말하는 영화감독으로서 삶의 유희를 즐기려 했던, 이제는 많이 사라진 한 시대의 여정이었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gnosis88@yahoo.com

펠리니가 더 궁금하다면

‘펠리니의 꿈과 회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나는 영화다>(황왕수 옮김/ 다보문화 펴냄)는 고향에서의 추억담에서부터 잡감(雜感)을 묶은 글까지 펠리니가 직접 쓴 이런저런 글들을 묶어놓은 책이다. 펠리니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한번 읽어볼 만하지만 꽤 오래 전에 나온 책이라 서점에서 여간해선 찾기 어려울 듯도 하다. 펠리니에 대한 최근 외국 서적 가운데에는 샘 로디의 <펠리니 어휘집>(Fellini Lexicon, BFI)이 있다. 펠리니의 영화세계에서 자주 나오는 주제와 모티브들을 알파벳순으로 정리한 것으로 ‘펠리니를 사랑하는 사람의 단상’이란 부제가 붙을 만하다는 평을 들었다. 한편 <이탈리아영화사>(로랑스 스키파노 지음/ 이주현 옮김/ 동문선 펴냄)는 1945년 이후의 이탈리아 영화사 전체를 훑어볼 수 있어 유용한 책이다. 하지만 워낙 간략한데다가 역주도 부실한 편이라 초창기부터 현재까지의 이탈리아 영화사 전체를 비교적 자세히 알고 싶다면 영어로 된 <이탈리아 영화 Italian Cinema>(마르시아 랜디 지음/ 케임브리지대학 출판부 펴냄)가 좀더 나을 듯싶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