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48권의 책으로 읽는 감독의 길 -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한다. [9]

B급영화 제왕의 A급 고백

<나는 어떻게 할리우드에서 백편의 영화를 만들고 한푼도 잃지 않았는가>

로저 코먼 지음·김경식 옮김 | 열린책들 펴냄 | 2000년 1월

로저 코먼이 그리스에서 <아틀라스>(1960)라는 영화를 찍을 때의 일이다. 그는 대규모 전투신을 찍기 위해 그리스군 500명을 동원받기로 했다. 그러나 촬영장에 나타난 인원은 고작 50명이었다. 누군가가 실수로 ‘0’을 빠트린 것이었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대규모 군대로 되어 있었지만 로저 코먼은 촬영에 들어가기 전 재빨리 대사를 수정했다. “이 적은 병력을 가지고 어떻게 저 거대한 성을 공략하시렵니까? ” 프락시메스의 답 역시 바뀌었다. “소수정예의 헌신적이고 잘 훈련된 병사들은 아무리 많은 오합지졸이라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교전신조요.” 자랑스럽게 이 일화를 이야기하던 로저 코먼은 말한다. “이것이 바로 나의 영화제작 신조입니다.”

뉴월드영화사, 콩코드-뉴 호라이즌 등을 경영하며 “300편의 이상한 영화 중 280편이 이익을 남겼다”고 자랑하는 이 실적 좋은 제작자는 종종 각종 영화제의 회고전에 불려다닐 만큼 명성을 쌓은 독특한 ‘B급영화의 제왕’으로 불린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한 장면 촬영도 불가능한 예산”을 들여서 “액션과 적당한 섹스, 그리고 약간의 기발함”에 조잡한 괴물이 등장하는 영화 한편을 일주일 만에 뚝딱 만들어낸 뒤 제작비의 3, 4배에 가까운 돈을 벌어들이는 로저 코먼.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그의 ‘간을 키운 건’ 유학생활을 빙자한 유럽생활이었다. 그는 카메라 밀수가 꽤 짭짤한 용돈벌이가 된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스위스 바젤에서 국경을 넘어가면 나오는 조그만 독일 소도시에서 라이카 카메라를 사서 파리의 미국인 관광객에게 팔면 대당 100달러 이상의 수입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독일에 들어가려면 허가가 필요했는데, 로저 코먼은 몇번 들락거린 뒤 입국한도가 넘자 바젤 시내에 차를 주차시키고 전차를 타고 국경 근처까지 간 뒤 아파트단지 사이를 지나가면서 보이는 철조망을 넘어 서독 국경에 다다르는 대담한 그러나 의외로 간단한 루트를 알아냈다. 그리고 이 밀수를 통해 한동안 꽤 두툼히 주머니를 불릴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은 그에게 “논리와 교묘함, 속임수, 그리고 약간의 대담함, 이런 것들이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했다. 이후 코먼은 배급망이 없는 상태에서도 지방 배급자로부터 선금을 받아내는 뛰어난 수완을 선보였고, 메이저스튜디오의 물량공세가 시작된 70년대 후반부터는 TV로 눈을 돌려 유선방송사로부터 촬영 시작 전에 제작비 전체를 회수한 때도 있었다. 한번은 데니스 호퍼가 출연하는 영화를 5만달러에 사들여 “말이 안 되는 영화에 자주 써먹는 방법”인 내레이션을 넣어 재편집해 홈비디오 업자에게 45만달러에 팔았다.

그러나 이런 장사꾼적인 수완만이 로저 코먼의 모든 것은 아니었다. 한번은 여배우 베벌리 갤런드가 대역없는 액션연기를 하다 발목이 ‘머리통만하게” 부어버렸다. “옷이 안 들어가서 촬영하기 힘들겠죠?”라는 말에 그는 “걱정없어”라며 그녀에게 4인분의 진통제 주사를 놓고 바지를 종아리까지 찢어서 폭을 넓히고 구두 역시 뒤를 찢어 테이프를 붙인 뒤 촬영을 마쳤다. 그러나 이 일을 겪은 갤런드는 감독에 대한 불평 대신 “로저와 함께 일하면 당신은 뭐든지 다 잘할 수 있다”고 감탄한다. 로저 코먼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 이들 역시 칭송받는 작가감독과 그의 추종자들이 그러하듯, 자기식대로 영화찍기의 광기에 휘말려 있었던 것이다.백은하 lucie@hani.co.kr

코먼이 더 궁금하다면

<로저 코먼의 영화들: 내식대로 문제없이 영화찍기>(The films of Roger Corman: shooting my way out of troble/ Batsford/ 알랜 프랭크/ 1998)는 초기작 <패스트 앤 퓨리어스>부터 55편의 그의 주요작들에 대한 소개와 간단한 평들이 포함되어 있고, 로저 코먼의 스토리편집자이자 개발이사로 10여년 가까이 지낸 비벌리 그레이에 의해 쓰여진 <로저 코먼: 독립영화계의 대부에 관한 내멋대로 전기>(Roger Corman: An unauthorized Biography of the Godfather of Indie fillmaking/ 르네상스 북)은 ‘개척자’적 기운을 떨치며 오늘날 독립영화감독의 모델이 된 영화감독 로저 코먼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자기 나름대로의 평가와 감상을 덧붙이고 있다. 이외에도 <로저 커먼의 영화: 예산짜기의 천재>(The films of Roger Corman:brilliance on a budget), <로저 코먼: 싸게찍기의 최고봉>(Roger Corman:The best of the cheap acts) 등이 있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