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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디 아워스>를 보고 일곱살 시절을 떠올리다

결국 승자는 세월이었어

초등학교 다닐 때 나에게는 별로 안 좋은 버릇이 있었다. 그걸 버릇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지 몰라도. 새 학년에 올라가 새 학기를 시작할 무렵, 실은 새 학기가 헌 학기가 될 때까지 나는 쉬는 시간마다 분주히 계단을 오르내리고 복도를 뛰어다녔다. 지난해 친했던 친구들이 두세명씩 모여 있는 반으로 달려가기 위해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 마리 어린 양 같은 모범생이었는지라 선생님한테나 친구들에게나 특별히 따돌림당할 이유가 없었는데 새 책상, 새 짝꿍, 새 선생님이 그냥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실은 이런 개인사를 나는 까먹고 있었는데 성인이 된 뒤 우연히 엄마가 환기시켜줬다. 학부모 회의에 갈 때마다 5년 내내 새 담임으로부터 늘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애가 적응을 잘 못하는 것 같다는. 그리고 엄마는 내가 남보다 뒤처진다거나 뭔가 잘해내지 못할 때마다 꺼내는 ‘일곱살론(니가 일곱살 때 학교에 들어가서 그래)’으로 간단히 정리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디 아워스>를 보고 나서 문득 떠오른 기억이다.

아마 “그때 우리보다 행복할 수 있었던 사람이 있었으리라 생각하지 않아”라고 반복되는 대사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스운 건 내 초등학교 일기장을 보면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허구한 날 “00랑 싸웠다. 이제 다시는 같이 놀지 말아야지”라고 적어놓아 그 시절의 나를 향해 ‘무슨 이렇게 속좁은 지지배가 다 있냐’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끊임없는 다툼과 후회와 화해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그 세월을 보내고 나서- 당시 1년은 분명 세월이었다. 지금이야 내 인생의 30분의 1도 안 되는 시간이지만 당시는 인생 전부의 10분의 1이 넘는 시간들이었으니까- 다른 시간의 단위에 들어갔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 우리보다 행복했던 사람은 없었을 거야. 다툼은 친구와 내가 벌였지만 결국 승자는 태연자약하게 흘러가던 시간, 세월이었던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해서 대체로 좋은 평이지만 일부에서는 ‘감상주의’, ‘자기도취적’이라는 비난을 한다고 한다. 책의 반 정도를 읽었을 때(이 영화를 보기 전 어떻게 책부터 읽게 됐다)까지만 해도 나는 이런 의견에 한표를 던지고 싶었다. 삶은 어차피 몸에 맞지 않는 옷이라구. 왜 이럴까, 이게 아닌데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도무지 살아남을 길이 없잖아. 침대에서 눈을 뜨고도 한참을 비비적거리며 자는 척을 하고 있을 때, 집을 나와 사무실의 내 자리로 들어가기까지 스쳐야 하는 눈길들, 책상들이 난감하고 끔찍하게 느껴질 때 해볼 수 있는 건 한 가지뿐이다. 네가 게을러서 그래. 일하기 싫어서 그런 것뿐이야. 네가 문제야. 이 한심한 인간아. 그리고 회사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나를 머뭇거리게 하고, 뒤돌아보게 하는 건 모두 핑계야. 절대 뒤돌아보지 마라. 절대로.

김혜리 기자가 <디 아워스>에 대해 쓴 에세이에서 인용한 것처럼 나는 그저 삶을 받아들이고 싶다. “거기에는 버리고 말고 할 만큼 대단한 가치조차 있지 않다고 냉랭하게 통고”하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사는 게 너무 피곤해지니까. 삶을 사랑한다는 것, 삶과 정직하게 대면한다는 건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니까.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서 종종 “인생, 하드보일드하게 가는 거야” 호기롭게 외치거나 “진정한 사이보그가 돼야겠어” 하며 나름대로 비장한 결심을 하곤 한다.

그래서 책장을 덮었을 때 그리고 이 영화를 봤을 때 불편하고 당황스러웠다. 솔직히 나는 아직도 버지니아 울프의 자살이, 로라 브라운의 가출이, 클래리사의 흐느낌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왜 삶에 대한 열정이 삶과의 고통스러운 불화로 이어지는지 모르겠다.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당황스러운 건 이건 이해의 문제도 인정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이다. 아들 리처드의 장례식에 온 로라는 이야기한다. “나는 몹쓸 엄마였다. 지나간 시간을 후회한다면 마음이 더 편할 수는 있겠지. 그러나 그건 죽음보다 못한 현실이었고, 나는 살기 위해서 집을 나왔다”고. 그 삶에 대해서 잘했다는 둥 잘못했다는 둥 판단할 수 있는 건 그의 곁에 있거나 그를 관찰하는 사람들의 몫이 아니라 세월만이 가진 권한일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내 갈 길- 당당함과는 거리가 먼- 을 갈 거다. 네가 게을러서 그래. 일하기 싫어서 괴로워하는 척하는 것뿐이야. 당장 털고 일어나라구. 아침마다 반복학습을 하면서 말이다. 김은형/ <한겨레>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