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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스 오브 뉴욕>,미완으로 끝난 스코시즈의 야심
홍성남(평론가) 2003-03-12

뜻밖의 비약, 성급한 결론

이제는 <갱스 오브 뉴욕>의 실체가 밝혀진 뒤이니만큼 마틴 스코시즈의 행보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이라면 이 영화에 대해 가질 법한 ‘오해’는 이미 지워버렸을 듯싶다. 즉 <갱스 오브 뉴욕>은 제목만 가지고 성급하게 추론할 수도 있듯이 <비열한 거리>(1973)나 <좋은 친구들>(1990)처럼 동시대의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친숙한 유의 갱스터영화가 아니라, 19세기의 뉴욕으로 들어가 그 과거 속의 도시에서 갱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래서 낯설다고도 표현할 수 있는 에픽-갱스터영화인 것이다. 그럼에도 <갱스 오브 뉴욕>을 두고 스코시즈적이지 않은 영화라고 말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제목에서도 드러나 있듯이 이건 뉴욕과 그 안에서 활동하는 갱스터들이라는, 스코시즈의 영화세계를 구축하는 중요한 요소들로 만들어진 또 한편의 스코시즈 영화이니까 말이다.

우선 영화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뉴욕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스코시즈는 자기가 자라난 그 도시에 대한 영화들을 계속해서 만들어온 사람이다. 그 영화들 속에서 그는 뉴욕이란 그 도시를, 마치 찰스 디킨스의 런던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성페테르부르크와 유사한, 어둡고 혼탁한 악몽의 도시로 주로 그려냈었다. <갱스 오브 뉴욕>에 그려진 과거의 뉴욕 역시 이런 면에서 크게 다르다고 말할 수 없겠다. 한편 범죄와 폭력의 행사에 깊숙이 몸을 담근 갱스터들은 스코시즈의 세계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인간형들이다. <스콜세지 커넥션>이란 책에서 레슬리 스턴이 “스코시즈에게서 영화적 욕망이란 갱스터가 되고자 하는 욕망과 쉽게 유리될 수가 없는 것이다”고 썼을 정도로 갱스터에 대한 스코시즈의 매혹은 쉽사리 떨칠 수 없는 종류의 것인 듯하다. 그리고 그 매혹은 <갱스 오브 뉴욕>에서도 고스란히 유지된다.

자기 영화세계의 근원을 탐사하다

요컨대 혼란스럽고 그래서 더욱더 매혹적인 듯한 뉴욕이란 도시와 그곳의 ‘비열한 거리’를 지나가는 갱스터들은 스코시즈의 영화세계와 그 안에서 새롭게 한자리를 차지한 영화 <갱스 오브 뉴욕> 모두에 중요한 재료들인 것이다. 다만 <갱스 오브 뉴욕>이 스코시즈의 여타의 갱스터영화들과 표면상 달라 보이는 것은, 여기에서의 갱스터들은 양복을 차려입고 여차하면 총을 쏘아대는 보기에도 ‘쿨한’ 갱스터들이 아니라 구식 복장을 한 채 칼이나 도끼처럼 지극히 원시적인 무기를 들고 달려드는 상대적으로 꾀죄죄한 모습의 갱스터들이고 그들이 활동하는 세계 역시 세련된 아스팔트 정글이 아닌 아직 진흙의 티가 가시지 않아 보이기에 현대적이지 않은 정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갱스터와 그들의 세계가 전혀 그것들답지 않아 보이는 시대, 다시 말해 갱스터라고 하면 연관되는 1930년대 이후의 시대가 아니라 그보다 대략 한 세기 전의 시대로 스코시즈가 굳이 거슬러간 것은, 아마도 그럼으로써 그 스코시즈가 자기 영화세계의 주축을 이루는 요소들의 뿌리에 다가가 그것을 들여다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갱스 오브 뉴욕>은 하나의 견고한 세계를 이룬 한 시네아스트가 직접 그 근원을 탐사해보고자 하는 영화라는 면에서 그 성취와 관계없이 이미 대단한 야심을 드러내는 영화라고 평가할 만하다. 우선 그렇게 인정한 다음에야 우리는 그의 야심이 과연 얼마만큼이나 성취되었는지를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스코시즈는 자신의 영화들은 모두가 일종의 ‘다큐멘터리’로 간주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건 19세기 중반의 뉴욕에 들어간 스코시즈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범죄와 폭력, 그리고 부패로 얼룩진 <갱스 오브 뉴욕>의 세계는 어떤 면에서는 분명히 리얼리즘에의 충동에 의해서 구축된 세계이다. 되도록 고증에 충실한 비주얼을 보여준다는 점, 치장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폭력을 스크린 위에 올려놓는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당대 역사적 현실의 공기를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이른바 토박이들(the Nativists)- 먼저 아메리카 땅을 밟은 앵글로 계통의 신교도들- 과 이주민들(the Immigrants)- 주로 대기근을 피해 아메리카로 물밀 듯 밀려들기 시작하는 아일랜드 가톨릭교도들- 사이의 갈등이라는 사실(史實)에서 드라마의 추진력을 발견한다.

그러나 <갱스 오브 뉴욕>에 구축된 세계는 완전한 리얼리즘의 세계라고 보기는 어렵다. 드라마의 긴장감을 높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노련한 이야기꾼이면서 이 거대 예산의 영화가 관객의 요구를 전적으로 무시할 수 없음을 알고 있는 영리한 할리우드 영화감독이기도 한 스코시즈는, 어떤 목적에서든 이 에픽 위에 신화의 기운을 불어넣을 필요가 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토박이와 이주민이란 적대적인 두 집단을 대표하는 도살자 빌과 암스테르담 사이의 관계는 일차원적인 갈등 이상의 미묘한 요소가 스며들게 된 것이다. 예컨대 암스테르담에게 빌은 아버지를 죽인 원수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비없는 자식인 자신의 양아버지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게다가 두 사람 사이에 제니라는 여성이 끼어들면서 서로간에 어느덧 질투의 감정까지 생겨난다.

이렇듯 미묘한 장식들이 달린, 신화적 세계의 존재들로서 빌과 암스테르담 사이의 갈등은 에픽으로서의 흥미를 자아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갈등이란 분명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이를테면 스코시즈는 둘 사이의 갈등 속에서 뉴욕(과 미국)의 역사가 새롭게 전환하는 한 지점을 본다. 어떤 면에서 빌과 암스테르담의 갈등이란 이미 미국인이 된 자와 아직 미국인이 아닌 자 사이의 갈등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빌은 자신이 미국인임을 공공연히 드러내곤 하는 인물이다(반면에 암스테르담은 미국인임에 대해 이야기하는 적이 없다). 암스테르담에게 그동안 자신이 느낀 공포를 이야기할 때 그는 성조기를 자기 몸에 두르고 있는가 하면 암스테르담과 결투를 벌일 때에는 미국인으로서 영광스럽게 죽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아메리카 땅을 먼저 밟아서 이미 미국인의 정체성을 획득한 그(토박이들)가 뒤늦게 그 땅에 들어오면서 자신의 영역들을 침범하는, 말 그대로 ‘이주민’들에 지나지 않는 아일랜드인들을 보고 못마땅해 하는 것은 그로선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 ‘미국인’에 대항해 그를 이겨냄은 이주민들이 ‘미국인’의 자리 속으로 한 발짝 더 진입함을 의미할 터이다.

다시 말해 빌에 대한 암스테르담의 승리는 이주민들이 미국인으로 인정받음으로써 뉴욕이 좀더 코스모폴리탄적인 세계로 전화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빌과 암스테르담의 갈등은, 그리고 빌에 대한 암스테르담의 승리는 뉴욕 역사의 새로운 한장 속에 포함되는 것이다(그렇게 <갱스 오브 뉴욕>이란 영화는 뉴욕의 새로운 탄생을 들여다본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암스테르담이란 이 주인공은 빌의 캐릭터가 가진 역동성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 인물, 따라서 주인공 자격이 부여되지 못할 만한 인물로 보인다. 동기도 잘 부여되어 있지 않고 성격의 깊이도 없는 식의 이런 빈약한 형상화는 극적인 긴장감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역사 속 존재로서 암스테르담의 상징적 개연성마저 흐리게 만든다).

폭력과 피의 역사를 말하다

우리는 빌과 암스테르담이 마지막 결투를 벌이는 이 결정적인 장면에 큰 기대를 걸고서 마주하게 된다. 오프닝에서 이미 화려한 비주얼과 박진감 넘치는 음악이 결합된 전투장면을 경험하고 난 뒤이기에 이때 그것보다 어떻게든 더 장대한 스펙터클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스코시즈는 우리의 이런 ‘자연스런’ 반응을 거부한다. 암스테르담이 빌에게서 치욕적인 내침을 당한 뒤에 와신상담 세를 규합해 빌과 맞설 때 빌은 “참으로 감동적인 스펙터클(touching spectacle)이로군” 하고 한마디 내뱉는데, 돌이켜보면 빌의 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말 한마디는 영화에서 더이상 장중한 스펙터클이 나오지 않음을 미리 이야기한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처럼 스펙터클의 어떤 절정에 이르지 못한 다소 싱거운 클라이맥스는 분명 실수가 아니라 스코시즈의 의도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 지점에 이르러 스코시즈는 빌과 암스테르담 패거리의 대결에다가 징집 반대 폭동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겹쳐놓는다. 빌과 암스테르담은 최후의 멋진 대결을 벌일 태세를 취하지만 충분히 장대함을 기대해도 좋을 이 갱들의 전쟁은 폭동을 진압하려는 정부쪽의 대포에 의해 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아주 실망스런 것이 되고 만다. 포연이 눈앞을 가리는 상황에서 멋진 결투장면이 나올 리가 없다. 영화의 이 마지막 결정적인 지점에서 스코시즈는 폭동이란 ‘역사’가 라이벌 갱들 사이의 화려한 전쟁이라는 ‘픽션’을 짓누를 만큼 좀더 무거운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럼으로써 격동의 시기에 처한 뉴욕을 지배하는 것은 갱스터들의 무력이 아니라 결국 그들보다 우월할 수밖에 없는 권력이라고 이야기해준다.

사실 영화가 이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갑작스레 역사의 무게를 끌고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이전까지 우리는 국가가 돈없는 이주민들을 징집해 전쟁터로 몰아가는 비열한 짓을 저지르고 있음을 보아왔다. 특히 유려한 카메라 이동으로 신참 병사들이 배에 오르는 것을 따라가다가 기어이 부두에 놓인 병사들의 관들을 보여주는 한 장면을 통해서 스코시즈는 국가가 가난한 이주민들을 데려다가 결국엔 죽음으로 몰고 가는 그 비참한 과정을 요령있게 제시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건 권력의 강압적인 행사를 보여주는 인상적인 장면이긴 해도 스코시즈가 최종적으로 노리는 의도와 유기적인 연관을 갖는 장면으로 보긴 힘들다. 이런 식의 장면들이 영화 곳곳에 산재해 있긴 하지만 그것들이 어떤 지점을 향해 서서히 파고들어갈 기미는 거의 없었다. 픽션에서 역사로 무게중심의 이동이 일어나는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의외인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게다가 현재의 뉴욕으로 이월해오는 영화의 끝부분에서 보듯, 이때의 희생들이 현재의 미국과 그 민주주의를 일궜다고 하는 것은 너무 비약이 심한 성급한 결론이라서 더더욱 의외로 다가오게 된다.

어떤 이들은 <갱스 오브 뉴욕>을 보고, 특히 갑작스런 자리이동이 일어나는 클라이맥스를 보고서, 이것이 구체적인 주제가 없는 영화라는 식의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건 지나치게 가혹하고 그래서 부당한 평가가 아닌가 싶다. 오히려 끝까지 보게 되면 이것은 신화적 존재이면서 현실적 존재이기도 한 갱스터들의 세계와 또 다른 비극의 역사를 포괄하겠다는 야심만만한 프로젝트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갱스 오브 뉴욕>은 마이클 치미노의 <천국의 문>(1980)이나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처럼 미국이란 국가가 강도높은 폭력과 그로 인해 넘쳐흐르는 피로 이룩된 것임을 장대한 스케일의 캔버스 안에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영화다. 문제는 스코시즈의 이 원대한 야심이 실현되었다고 보기에는 긍정적인 대답을 내리기가 어렵게도 미완의 시도로 그치고 말았다는 점이다. 앞으로 스코시즈에게 이처럼 광대한 캔버스 안에서 자신의 재능을 쏟아부을 또 다른 기회가 올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기에 <갱스 오브 뉴욕>은 아쉬운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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