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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병준의 <달려라! 봉구야>

사람, 풍경, 혹은 그냥 스쳐가는 것들

진보하는 작가를 만나는 일은 독자에게 큰 행복이다. ‘변병준의 작은 만화’인 <달려라! 봉구야>를 세번 읽고 내린 결론이다. 먼저 간략한 독후감을 소개한다. 첫 번째 읽고 나서는 심심했다. 초기 단편에서 보여준 유머도 없고, <프린세스 안나>에서 보여준 지독한 자폐감도 없는 그저 착하고 착한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비현실적으로 보였고, 나에게 무덤덤하게 다가왔다. 두 번째 읽고 나서 한컷을 그리기 위한 작가의 부단한 노력이 읽혀졌다. 특히 세밀하게 묘사된 서울 도심의 풍광은 다른 만화에서 그 예를 찾기 힘든 정성과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거의 모든 페이지에 살아 있는 배경은 몇개의 자료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작가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선 취재의 결과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세 번째 읽고 나서 나는 이 심심하기 그지없는 만화에서 새로운 재미를 찾아냈다. 그리고 변병준이라는 만화가가 덜어냄, 보여주지 않음, 생략과 같은 만화의 미묘한 힘에 대해 눈을 떴다는 것을 깨우치게 되었다. 작가는 자신의 깨우침을 심심한 이야기에 나누어 숨겨놓았고, 감각이 늦된 독자인 나는 그것을 세번의 독서 끝에 깨달았다.

연기하는 배경

<달려라! 봉구야>의 두드러진 특징은 수채풍 컬러와 치밀한 배경 묘사에 있다. 특히 첫 번째 흑백 시퀀스에서 발견하는 서울 도심의 스케치는 영상언어로 읽힌다. 보통 만화에 등장하는 이미지가 상징화된 형상이라면, <달려라! 봉구야>의 첫 번째 시퀀스는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심의 실재적 형상이다. 우울한 도심의 이미지로 시작된 첫 시퀀스는 개별화된 인간이 아무런 감정없이 조우하는 지하철이라는 공간으로 넘어간다.

서울 도심이라는 풍광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이야기 안으로 들어와 이 만화만의 미장센이 된다. 무심하게 그 자리에 존재하는 배경이 아닌, 캐릭터와 함께 연기하는 배경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 봉구와 봉구 엄마를 제외한 주변의 인물들이 흘러가듯 그려진 장면으로 이어지며 거대한 서울 도심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쓸쓸함을 이야기한다. 자연과 일상이 함께 공존하는 작은 바닷가에서 올라온 엄마와 아들은 거대한 도심에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 난처함을 느낀다. 엄마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걸고, 봉구는 비둘기와 만난다. 흑백이 연속되다 전화를 건 엄마의 모습을 잡은 칸에서 컬러가 등장하고, 다시 흑백이 이어지다 꼬마 여자아이가 등장하며 컬러로 전환된다. 낯선 도심에 고립되어 있는 두 사람을 잡아낸 흑백 시퀀스의 영상적 흐름은 컬러로 전환되며 이야기를 얻는다.

첫 번째 흑백 시퀀스에서 한강, 지하철, 지하철역 등으로 이어진 서울 도심이라는 풍광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이야기 안으로 들어와 <달려라! 봉구야>만의 미장센이 된다. 무심하게 그 자리에 존재하는 배경이 아니라 캐릭터와 함께 연기하는 배경이라는 말이다. 작가는 매우 의도적으로 배경을 취재해 작품 안에 자리잡았고, 그 배경은 서울이라는 거대 도심의 외로움을 효율적으로 드러낸다.

칸과 칸이 엮어내는 각운의 매력

배경과 함께 주목되는 연출은 세로로 긴 칸에 여러 명의 인물을 길게 배치하고 하이앵글로 잡아낸 칸의 사용이다. 이 세로로 긴 칸에는 2명, 3명, 4명이 존재하는데 전체 100쪽 중 15번 이상 반복된다. 이 칸은 대부분 만남과 헤어짐을 묘사하는데,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상황을 전지적 입장에서 바라보는 객관화의 기제로 활용된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독특한 칸 연출이 만들어내는 라임, 즉 각운의 매력이다.

<달려라! 봉구야>의 서사구조는 길게 펼치면 모두 ‘만남’이라는 동일한 키워드로 요약된다. 갈등이나 서스펜스가 개입하기보다는 우연처럼 보이지만 만남의 고리가 연속된다. 아버지를 찾아왔다가 우연히 꼬마 여자아이를 만나고, 그 여자아이의 할아버지를 만나고, 그래서 아버지를 만나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만나 시골에 내려간다. ‘헤어짐’이라는 상처와 아픔이 전제되지만, 적어도 100쪽의 이야기 속에 헤어짐은 ‘피드백’으로만 존재한다.

시간의 흐름에서, 표면적인 서사의 흐름에서, 칸과 칸의 연결에서 존재하는 것은 만남이다. 그리고 이 여러 개의 만남을 연결하는 역할이 앞에서 설명한 세로로 긴 칸에 여러 인물을 길게 배치하고 하이앵글로 잡아낸 칸이다. 이 칸과 칸의 라임을 즐기는 기분은 마치 힙합을 듣는 것과 같다. ‘만남’이라는 시퀀스가 유사하게 반복되며,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고 다시 새로운 만남으로 연결되는 유연한 리듬감이 느껴지는 구성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보다. 작가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이 작품은 쪽 나누기, 칸 나누기, 칸 연출하기 등 만화연출에서 전작창작만화 특유의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달려라! 봉구야>는 갈등과 해결의 전통적 서사구조 대신 배경과 칸으로 이야기하는 독특한 만화다. 그렇다. 우리 만화는 분명 진보하고 있다. 그 진보는 변병준처럼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하는 작가들에 의해서, 새로운 판을 함께 준비하는 작은 출판인들에 의해서, 고난의 길에 참여하려고 하는 젊은 지망생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