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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계단:여고괴담 세번째 이야기>,뉴 페이스를 만나다 [3]
이영진 2003-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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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갈 수 없는 평가의 순간

합정동 연습실은 오늘따라 ‘만원’이다. 감독을 비롯한 연출팀 모두 시찰을 나온데다 엊그제 혜주, 윤지 역에 발탁된 이들까지 매니저 대동하고 마실을 나와서다. 이날은 지효와 한별이 발레 연습을 시작한 지 23일째, 그동안 연마한 기량을 선보여야 하는 일종의 ‘중간평가’ 자리다.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웃음보는 잠시 꿰매뒀나. 허리 높이의 바를 잡고서 플리에 동작을 반복하는 지효, 한별의 표정도 평소보다 진지해 보인다. 다만 지효는 긴장하는 눈치다. 전신 거울을 보는 시선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고 자세 또한 기움없이 꼿꼿하지만, 바에 드리운 한쪽 팔은 균형을 유지하느라 부르르 떨고 있다. 몸풀기가 끝나자마자 숨 쉴 틈 없이 이어지는 파드 세와 주테. 동선을 확보할 만큼 연습실 크기가 충분하지 않은 탓인지 힘찬 도약을 구경할 순 없다. 그래도 동작 연결은 전보다 한결 자연스럽다. 다음은 제자리 공중 점프. 발을 교차시킨 다음 쉬지 않고 방향을 전환하는 훈련이다. 하지만 네 번째 점프는 이뤄지지 못한다. 착지 도중 ‘뚝’ 하는 소리가 나고 지효는 그대로 주저앉는다. 사고다. 발목을 부여잡고 고개를 떨어뜨린 지효는 이내 굵은 눈물을 떨어뜨린다.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지효를 둘러싸고 응급처치에 나선다. 표정 변화가 좀처럼 없는 감독의 눈가도 근심으로 실룩인다.

♣ 붓기 전에 병원에 가야 할 것 같다는 의견이 대세. 메이킹을 찍던 스탭까지 가세해서 근처에 용한 한의사가 있다고 거들었다. 아무 말 없던 지효만이 반대 의사 표시. 근데 이유가 별스럽다. “쪽팔리잖아요….” 그 말에 다들 웃으며 ‘걸어보라’ 한다. 절룩거리는 지효, 결국 병원 신세를 졌다. 참고로 스탭이 소개한 침 잘 놓기로 유명한 용한 한의사는 이미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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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복을 입고…

신사동의 한 스튜디오. 홍보용 사진을 찍느라 4명 모두 교복을 입었다. 영화 속 교복은 아니지만, 나란히 카메라 앞에 서니 대강의 ‘간지’가 서린다. 다들 연습이 없는 날이라 휴일 같은 분위기. 이날 촬영 도중 짬이 나기만 하면 지효는 식탐을 해소하기 위해 끊임없이 뭔가를 입 속에 집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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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는 ‘미이라’ 되기

이쯤 되면 숫제 ‘고문’이다. 세개의 붓은 이내 조안의 조그만 얼굴을 실리콘 범벅으로 만들어버린다. 그 위에 다시 덧씌워지는 석고 붕대. 호흡을 위해 코 아래 조그마한 구멍을 제외하면 안면은 두터운 이중막에 의해 철저하게 봉쇄된다. 장시간,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고역이다. 미세한 안면 근육 변화도 금물. 시야를 가렸을 경우 공포감이 심한 이는 특수분장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벌써 자정이 다 된 시각. 숨쉬는 ‘미이라’가 되어버린 조안은 꿈쩍하지 않고 있다. 잠이 든 것일까. 하긴 전신 틀을 짜기 위해 양손에 지지대를 붙잡고 2시간30분가량 큰 대자 모양으로 버틴 다음에도 쓰러지지 않은 걸 보고서 다들 놀랐었다. 마른 것을 확인한 특수분장 팀장이 일단 석고를 떼어낸 다음 머리 뒤쪽부터 실리콘 절개에 들어간다. 씌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벗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 30분 가까이 걸려서 조심스레 걷어내자 빨갛게 오른 조안의 안면이 드러난다. 괜찮느냐고 묻는 것조차 쉽지 않을 정도로 힘들어 보인다. 한참 뒤에 “거울 줘 봐”라며 얼굴을 확인하는 조안. 뚱뚱한 혜주가 되기 위해 가짜 살 만드는 작업에 6시간 넘게 몸을 혹사한 탓인지 조안의 눈은 새빨갛게 충혈됐다.

♣ 전신 틀을 짜는 작업은 비공개로 이뤄졌다. 분장팀 2명의 여성이 일단 몸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실리콘을 덧바른 뒤에서야 그 밖의 제작진의 출입이 가능했다. 대개 배우들은 전신 틀 작업을 끝낸 다음 쓰러지는 이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몸에 난 작은 솜털까지 단번에 제거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실리콘을 떼어낼 때 멍이 들 수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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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봐, 다시 걸어봐, 아니아니 다시…

“무슨 생각하고 걷는 거니?” 감독은 되묻고선, 지효에게 몇번이고 왕복 걷기만을 시킨다. 그리고 “좀더 느리게”, “목이 자꾸 빠지거든”, “이번엔 세번으로 나눠서 걸어와” 등의 추가 주문을 덧붙인다. 하지만 이십번 가까이 계속되는 동안 지효는 “감독님이 요구하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몰라” 조금 혼란스러워 보인다. 감독이 가장 주안점을 두고 있는 건 지효에게 진성을 불어넣는 일. 눈빛이나 표정은 강렬한데 워낙 진성의 캐릭터와 지효의 성격이 달라서 애를 먹는 듯하다. 첫 연습 때, 평소 하던 대로 운동복 입고 머리에 핀 꽂고 왔기에 다음부터서 “꼭, 치마입고 다니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잠깐의 휴식 동안 지효는 전날 밤에 웃긴 사진 한장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슬쩍 꺼낸다. 하지만 감독은 곧바로 말을 자르고선 “뭔가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를 느끼면서 “다시 한번 걸어보라”고 밀어낸다. 지효도 이번에는 슬리퍼까지 벗고서, 한발 뒤로 더 물러나서 충분한 동선을 확보한 다음 전신 거울을 벽으로 여기고서 또 한번의 ‘가상 테이크’를 시도한다.

♣ 자식 흉보는 어미 없다고 했던가. “취재가 부담스럽냐”고 했더니 감독은 “(배우들이) 잘 못하는 걸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라고 답한다. 그러고보니 연습 현장을 찾은 날에 감독이 화를 낸 것을 본 적이 없다. 지효의 말도 그렇다. “지난번에 가신 다음에 감독님에게 되게 혼났어요. 욕하시고 때리고 그러진 않지만, 내가 안 되는 부분에 대해서 족집게처럼 집어내시거든요.”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만, 그건 말해줄 수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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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것을 보여줄 필요는 없어”

일주일을 남기고서 휴일에도 연습이 계속된다. 먼저 도착한 조안은 혼자서 태권도 발차기를 하더니만 감독이 도착하자마자 곧장 콘티북부터 편다. 물어볼 것이 그리 많은지, 감독은 조안의 따발총 질문 공세에 숨돌릴 틈 없다. 캐릭터 분석 때 장자의 호접몽까지 인용하더니만, 오늘도 여전하군. 대략적인 질문에 답해준 다음, 감독은 지난번 연습 때 녹화해둔 독백 테이프를 꺼내들어 복기한다. “저건 너무 산만하지”, “상상 속의 독백인데 지나치게 누군가를 앞에 두고 말한다는 느낌이 너무 들지 않아?” 이번엔 감독의 공격이다. “너무 많은 것을 보여줄 필요는 없어. 정확한 느낌을 전달해주면 되는 거지.” 연습시간에 늦은 지연에게도 감독의 요구는 계속된다. “지금 약간 흥분된 상태인데 왜 그래?” 굳은 감독의 표정에 “머리가 너무 아파서요”라고 간신히 말하는 지연. 그런데 감독은 뜻밖의 말을 한다. “아까 목소리 톤이 좋거든. 다소 들뜬 느낌. 윤지라는 인물은 생각대로 말을 뱉는 애일 거라고.”

♣ 감독과 배우는 현장에서도 서로의 주파수 대역을 찾기에 끊임없이 골몰한다. 물론 사전 리허설 때와 달리 현장은 방해물이 많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리드만으로는 장애를 넘을 방법을 찾지 못하는 때가 많다. 3월23일 크랭크인. 앞으로 2달 동안 네명의 배우와 감독은 여행을 떠난다. 그들이 어떤 과실을 담아가지고 돌아올지는 전적으로 현장에서 감독과 배우의 접붙이기가 얼마나 성공적이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글 이영진 anti@hani.co.kr·사진 조석환 sky010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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