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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자국만 천천히 가겠습니다,<대한민국 헌법 제1조> 배우 장유화
박혜명 2003-04-02

연예계엔 흔한 말이 떠돈다. 이면에 다른 뜻은 없지만 듣는 이들은 오해하고 말하는 이들은 껄끄러워한다. “솔직히 말하면, 전 노력한 거에 비해 운이 좋았던 편이에요.”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서 신부님을 도와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던 윤락녀 정혜는 밤길에 동네 청년들에게 강간당한다. 부담됐을 법한 역할로 얼굴을 내민 이 신인은 그러나 “원래 후회를 잘 안 하는 성격이거든요”라고 대화를 열었다. 당돌한 첫인상의 장유화는 어려서부터 배우의 꿈을 품지도, 늦게 얻은 꿈을 향해 남모르는 노력을 쏟지도, 아직 배우를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지도 않는 갈수록 당돌해 보이는 ‘친구’였다. 그가 연기자로 데뷔하기까지 과정을 한 단어로 줄이기에 ‘좋은 운’보다 적절한 말은 없어 보였다. 딱히 원하는 게 없는데 남들 가니까 나도 가는 대학이라면 안 가겠다는 결심을 실행한 그는, 재수생도 대학생도 아닌 삶의 첫해인 1999년, 길거리 권유를 받으면서 지름길을 타기 시작했다. 인터넷 라디오 방송의 진행을 똘똘히 해낸 그는 곧 극단을 소개받았다. 그러나 6개월간의 워크숍을 거쳐 <무한아>란 연극으로 무대에 오른 순간에도 평생 지고 갈 감흥까지 얻진 못했다. 이후 잡지, 카탈로그, 뮤직비디오, CF 등에 간간이 얼굴을 내미는 걸로 대학생활을 대신해왔다.

“원래는 <천년호> 출연 문제로 간 거였어요. 그 감독님 만나러 들어가는데 저쪽에서 누가 그러시는 거예요. 야! 쟤 정혜야, 정혜!” 지나가는 장유화를 한눈에 정혜 역으로 점찍어버린 감독 덕분에, 캐스팅조차 불확실했던 <천년호>에 대한 미련은 깨끗이 접었다. 배우로서 자기 모습을 처음 비쳐보기에 큰 영화와 큰 배역은 도수 안 맞는 안경처럼 머리만 아프고 어지러운 거울이었다. “정혜 역은 지금 안 하면 나중에 후회할 거 같더라구요.” 우연은 기회를 줄 뿐, 그것을 포착할지 판단하는 과정엔 관여치 않는다. 정혜 역을 수락하는 판단은 전적으로 장유화의 몫이었다.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은 시작이었다고 생각한다. 열정보다 먼저 찾아온 기회 덕에 시작한 일이라 그런지 아직까진 절실함이 없지만 한 5년은 열심히 해볼 생각이란다. “테스트 기간이다, 생각하고 정말 열심히 해보다가 이 길이 아니다 싶으면 과감히 접으려구요.” 연기는 그에게 평생을 걸 승부처가 아니라, 감각을 솔깃하게 세워주는 게임일 뿐이란 얘기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한 발자국만 천천히 가죠, 뭐. 연기 잘한다는 칭찬부터 받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 제 자신한테 투자하고 싶은 것도 많구요.” 우연으로 이 길에 들어섰지만 장유화는 시작 어귀에서 제법 정확한 나침반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가 못 박은 테스트 기간도 언제 어떻게 조정될지 본인조차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올해 동덕여대 방송연예과 03학번으로 ‘할 것을 만나 대학에 들어간’ 이 당돌하게 운좋은 친구는, 벌써 새 영화와 드라마를 준비 중이다. 5년 만? 글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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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조석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