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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몸으로 표현하는 지성

나는 춤꾼들을 사랑한다. 여신 같은 마곳 폰테인과 그를 들어올리며 파드되를 추는 루돌프 누레예프, 이사도라 덩컨과 마사 그레이엄, 1988년 시청 앞 광장의 이애주, 요염하기까지 했던 남성무용수 이매방, 70년대 국내에서 첫 공연을 가졌던 홍신자, 그리고 박명숙 이정희와 심지어 가수들 뒤에서 현란하게 춤추는 백댄서들과 두타 앞이나 대학로 등 거리의 춤꾼들까지.

춤을 잘 출 수 있다면 하는 것은 20대 이후의 오래된 열망이었다. 남이 가진 능력 가운데 가장 부럽고 샘나는 것, 훔칠 수 있다면 훔쳐오고 싶은 것이 춤추는 능력이다. 그러나 음치가 있듯이 몸치가 있는 것을 어이하랴. 마음껏 소리치고 싶을 때, 몸부림쳐 통곡하고 싶을 때, 기쁨에 겨워 날아갈 것 같을 때, 온몸을 던져 춤을 출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춤에 비하면 다른 예술적 작업들은 머리와 가슴에서 걸러지고 재창조되는 2차적 표현에 불과하다. 숨을 멎게 하는 미술 작품, 가슴속에 끝없이 크고 작은 파도가 밀려오는 시와 소설들, 피를 소용돌이치게 하는 음악, 벼락같이 머리를 내려치는 철학적 경구, 정교한 이론으로 현실을 꿰고 분석해내는 각종 이론들…. 사람이 만들어낸 지적, 예술적 소산물은 우리의 정신에 충격을 주어 잠자던 무의식을 일깨우기도 하고, 때론 상처받은 가슴을 위무한다. 그 가운데 가장 원초적이고 감각적인 장르가 춤일 것이다.

어느 해 여름방학인가 무용발표회를 앞둔 친구를 만나러 학교에 간 적이 있었다. 지하의 어두컴컴한 체육관에 들어서자 맨발의 타이츠만 입은 스무명쯤의 춤꾼들이 무리지어서 춤을 추고 있었다. 구르고 뛰어오르고 느리게 또 빨리, 힘차게 또 부드럽게, 각자 또 홀로, 그들은 무아지경에 빠져서 격정적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사람에게 팔과 손과 다리와 엉덩이와 무릎과 목과 어깨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대여섯 시간을 꼼짝않고 못박혀 앉아 있었다. 사람이 머리만 굴리는 정신의 덩어리가 아니고 온갖 동작을 할 수 있는 몸뚱이를 가진 존재라는 것이 얼마나 축복으로 여겨졌던지… 그러나 그것을 할 수 없는 자신이 얼마나 저주스러웠던지….

이 봄에 기가 막힌 무용공연들이 줄지어 있다. 스웨덴 쿨베리발레단의 ‘백조의 호수’는 맨발의 대머리 남성무용수들이 백조들를 춤춘다 하여 화제가 되었던 공연이다. 독일의 구전된 설화를 바탕으로 차이코프스키가 발레모음곡을 만들고 그뒤 숱한 안무가들과 춤꾼들에 의해 공연되었던 ‘백조의 호수’의 이야기구조는 단순하다. 힘세고 용맹한 왕자가 마법에 빠진 아름다운 백조 공주를 구해낸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안무가 마츠 에크는 유약한 왕자와 힘세고 교활하고 능동적인 백조를 탄생시켰다. 고전적인 ‘백조의 호수’가 우아함과 절제된 아름다움을 주면서 지루한데 비해 맨발의 대머리 백조는 힘차고 역동적이고 관능적이고 숨가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사람의 몸은 뇌와는 다른 또 하나의 지성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안무세계와 고전을 재해석하는 방식이 이 말 한마디에 함축되어 있다. 남성무용수들의 백조가 얼마나 충격적이고 감동적이었는지 같이 공연을 관람한 젊은 여성은 춤추는 남자와 연애하고 싶어라며 한숨지었다. 남자 백조들은 또 몰려온다. 매튜 본의 댄스뮤지컬 ‘백조의 호수’가 5월에 국내 공연을 갖는다. 런던의 웨스트엔드에서 공연을 시작하여 미국의 브로드웨이를 석권한 이 ‘백조의 호수’도 남자무용수들이 맨발로 백조를 춤춘다.

그리고 무엇보다 피나 바우쉬의 탄츠 테아터가 온다. 몸으로 표현하는 지성이라는 표현에 가장 적합한 춤이 피나 바우쉬의 탄츠 테아터일 것이다. 1980년대에 사람의 목소리와 극무용을 혼합한 탄츠 테아터 양식을 만들어 세계무용계에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낸 피나 바우쉬의 공연 모습은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된 페드로 알모바도르 영화 <그녀에게>에 소개되어 한국 관객의 관심을 모았었다. <그녀에게> 국내 개봉에 맞추어 포르투갈의 서정적인 파두가 배경으로 흐르는 피나 바우쉬의 춤이 4월 말에 LG아트센터에서 선보인다. 자본주의적 패권주의와 종교적 광기로 인해 이성이나 지성이 더없이 무기력해진 이 봄, 피나 바우쉬의 탄츠 테아터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작은 위안거리다. 김선주/ 한겨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