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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애니메이션 <오세암> 미리 보기 [1]
황혜림 2003-04-18

“엄마 얼굴이 생각 안나…”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참으로 오래된 기억의 주크 박스 한켠에, 어린 날 한두번쯤 되뇌어봤음직한 동요 <섬집 아기>도 아마 들어 있을 것이다. 엄마를 기다리며 홀로 잠든 아이의 풍경화가, 어린 맘에도 어쩐지 서글픈 정감과 막연한 그리움의 여운을 남기던 노래. <오세암>은 극중에 삽입된 이 노래처럼,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지금에서 돌이켜보면 멋쩍을 만큼 투명한 동심의 기억을 부르는 애니메이션이다. 해맑은 순수 운운하는 건 어른들의 공연한 향수라고, 인터넷 시대의 영악한(?) 아이들에게 동심이 웬말이냐고 툴툴거린다고 해도, 이미 성장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이로서는 결코 다 기억해낼 수 없는 유년의 소우주에만 존재하는 비밀. 죽음의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래서 간절히 원하면 엄마를 만나리라는 믿음을 지키는 5살배기 소년 길손이, 그런 동생을 안타깝게 보듬어주는 눈먼 소녀 감이의 여정은, 그 비밀에 가까운 눈높이에서 두 남매의 소망과 성장기의 한 토막을 들려준다.

알려져 있다시피 <오세암>의 원작은 동화작가 고 정채봉 선생의 동명소설. 1985년 초판된 이래 10만부 이상이 팔린 스테디셀러로, 1990년 박철수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바 있다. <오세암>은 2000년 10월부터 약 석달간 인기리에 방영됐던 TV애니메이션 시리즈 <하얀마음 백구>(이하 <백구>)의 제작진이 고른 두 번째 프로젝트. 하나의 프로젝트가 끝나면 이합집산하기 쉬운 국내 제작환경에서 보기 드물게 이정호 PD, 성백엽 총감독 등 <백구>를 거친 팀은 마고21이란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만들었고, 첫 장편애니메이션 <오세암>을 기획했다. 부모를 잃고도 꿋꿋이 살아가는 오누이와 진돗개의 우정을 담은 <백구>의 알찬 성공이, ‘한국적인 가족용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남겨준 덕분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즐길 수 있는 훈훈한 이야기, 우리 고유의 정서와 인물과 풍경을 담은 작품을 고민하겠다는 야심찬 출사표 아래 보낸 약 2년 반의 시간. 4월25일로 다가온 개봉을 앞두고 마지막까지 리테이크와 사운드 작업에 한창인 <오세암>을, 강남의 한 녹음실에서 미리 들여다봤다.

잊혀진 정서, 푸근한 감성

여정의 시작은, 길손이의 표현대로라면 “하늘처럼 생긴 물인데, 꼭 보리밭같이 움직”인다는 바닷가. “바람을 타고 엄마 있는 데까지 갈 수 있을” 날개를 가진 갈매기를 부러워하며 뛰놀던 소년은 앞 못 보는 누나의 손을 끌고 모래사장에 작은 발자국을 찍으며 마을로 향한다. 빨갛게 물든 단풍 너머로 보이는 산봉우리, 구불구불한 흙길 양옆으로 펼쳐진 누런 논밭, 그리고 감나무의 홍시를 따거나 말뚝박기를 하는 아이들과 광주리를 이고 지나가는 아낙네들. 짚더미가 실린 소달구지를 얻어 탄 남매와 함께 펼쳐지는 늦가을 농촌의 정경은, 고운 색조와 꼼꼼한 필치로 그려낸 한폭의 담채화 같다. 70년대 복고풍이지만, 우리 고유의 산수를 닮아 사실적이면서도 정겨운 운치를 지닌 공간. 개울가에서 삶은 감자를 사이좋게 나눠 먹고, 후두둑 떨어지는 단풍 세례에 가을을 느끼는 두 아이의 티없는 웃음까지, <오세암>은 현대 도시의 삶에서 잊혀진 정서와 풍광으로 문을 연다.

그렇게 세상에 없는 엄마를 찾아나선 길손이와 감이는 우연히 마주친 삽살개와 친구가 되고, 설정 스님 일행을 만나 절에서 겨울을 나게 된다. 하지만 “스님들은 부처님 흉내만 내”고, “움직이는 건 나하고 바람이(삽살개)밖에 없”는 절간 생활은 어린 길손이에게 따분하기 그지없다. 법회 중인 불당에 성큼 들어가 “아저씨랑 다 똑같아서, 한참 찾았네” 하고 씩 웃으며 설정 스님에게 누룽지를 건네는가 하면, 걸레로 바닥을 훔치지만 씻지 않은 발의 자국만 찍어대는 길손이. 밥값이라도 하려고 초겨울 날씨에 설거지를 거드느라 손이 어는 누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단의 과일을 무너뜨리고 염주를 끊어먹고 스님들의 고무신을 몽땅 나무에 매달아놓는 길손이의 천진난만한 활약은 자칫 단조롭게 느껴지기 쉬운 산사의 일상에 오밀조밀한 웃음을 풀어놓는다.

짤막한 원작을 75분 길이의 장편으로 각색하면서, 아이다운 세계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는 에피소드가 보강된 <오세암>은 성장동화의 색채가 짙어졌다. 개울에서 수도 중인 스님의 옷을 노루에게 입히고는 춥지 않을 거라며 뿌듯해하고, 설정 스님을 따라 관음암으로 가는 길에 힘이 부치자 “나 굴러갈래” 하며 대뜸 눈 위로 데굴데굴 굴러버리는 아이. “엄마 얼굴이 생각 안 나… 만날 누나 꿈에만 나타나고, 내 꿈에는 한번도 안 와. (중략) 엄마는 바람 같아. 내 마음만 흔들어놓고 보이지가 않아.” “겨울인데 꽃이 피었어. 저기 돌부처님이 입김으로 키우셨나 보다, 그치? 병아리 가슴털처럼 보송보송 털이 났어.” 원작자 특유의 표현을 상당 부분 살린 대사도, 아이의 세상이 품은 비밀을 들춰 보이듯 독특한 미감을 지니고 있다. 길손이의 목소리를 맡은 MBC 공채 15기 성우 김서영씨의 자연스러운 연기도, 톡톡히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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