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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들 [3]
김혜리 2003-04-18

개같은 이별, 그리고 다시 관계가 시작되다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1988)의 페파

배우 페파는 분명한 결별선언 없이 통화를 피하며 여행짐을 싸달라는 애인 이반 때문에 미칠 지경이다. 오래 전 정신병을 앓고 이반과 헤어진 전처 루치아는 이반의 여행 동행이 페파라고 믿고 다그친다. 친구 칸델라는 테러리스트와 연애를 했다며 페파의 집에 숨어들고 페파의 아파트를 보러온 커플은 이반의 아들과 약혼녀다. 게다가 칸뗄라를 돕기 위해 찾아간 변호사는 이반의 새 애인. 페파의 우주는 폭발 직전이다.

사랑의 숭배자들은 사랑의 퇴장 역시 합당하게 숭고하고 엄숙한 의식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중년 여배우 페파에게 그런 행운은 돌아오지 않는다. 오랜 애인 이반은 제대로 이별을 고하는 최소한의 예의도 없이 그녀를 피해 다닌다. 여행을 떠날 터이니 가방을 수위실에 맡겨 달라는 비겁한 메시지를 남기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니까 페파의 실연은 충치를 뽑을 때의 개운함을 수반한 뜻있는 아픔이 아니라 생이빨을 뽑는 억울한 통증이다. 온 세상이 그녀의 비탄을 존중하지 않는다. 정신과 치료를 받다가 오래 전 이반과 헤어진 전처는 여전히 페파를 깔보며 욕한다. 세 다스의 진정제를 갈아넣은 토마토 주스를 먹고 잠 속으로 도망치려고 하면, 담뱃불에 침대가 불타오른다. 셔츠 바람으로 호스를 휘두르는 페파 뒤로 무슨 심술인지 알모도바르 감독은 생뚱맞은 우아한 현악을 깔아놓는다. 심지어 페파 자신의 이미지조차 그녀를 비웃는다. 슬픔을 곱씹는 페파 앞의 TV에서는, 아들의 피묻은 옷을 감쪽같이 세탁하고 흐뭇해하는 살인범의 엄마로 분한 그녀가 자랑스럽게 외치고 있다. “세제는 역시 백설표예요!”

그런데 이상하다. 극도로 열악한 처지의 이 여인에게 보호와 위로를 청하는 영혼들이 꼬인다. 관계를 확신 못하는 이반의 아들 카를로스와 처녀성을 거추장스럽게 느끼는 그의 피앙세, 시아파 테러리스트와 연루된 친구가 페파의 아파트로 찾아온다. 대홍수를 앞둔 구약성서의 노아처럼 페파가 키웠던 쌍쌍의 동물들도 배고픔을 호소한다. 왜일까? 알모도바르는, 그야 페파가 자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강한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현기증나는 소동 와중에 넌지시 설명한다. 과연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던 페파는, 누군가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조언하고 수습하며 번번이 구두를 갈아신고 택시를 잡으러 뛰쳐나간다. 급기야 정리하기로 맘먹은 애인의 목숨까지 구해놓고 돌아선다. 이반을 보낸 페파는 사랑의 흔적을 보기 두려워 내놓았던 아파트를 팔지 않기로 한다. “이사는 안 갈래. 이런 전망 찾기 힘들잖아?”

<나의 그리스식 웨딩>의 아버지처럼 그리스 어원을 따지자면, 히스테리는 난소가 몸속을 돌아다니며 광기와 신경계의 말썽을 일으킨다는 의미였다고 한 비평가는 지적했다. 신경쇠약은 기원전부터 여성과 짝지워져 약하고 변덕스럽고 감상적인 여성성을 규정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알모도바르의 페파는 제목의 상투성을 멋지게 배반한다. 극중 한 장면에서 페파가 듣는 음악이, 화려한 모험담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기를 보존한 여인에게서 영감을 얻은 <세헤라자데>였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얘야, 정말 미안하구나”

<하이힐>(1991)의 베키

앵커우먼 레베카는 12살 때 헤어져 외국에서 활동하던 가수 엄마 베키와 재회한다. 엄마를 깊이 동경했던 레베카는 방송사 사장이자 엄마의 옛 애인과 결혼했고, 베키의 노래를 립싱크하는 여장 남자 레딸의 단골 관객이다. 모녀가 서먹한 가운데 사위는 장모에게 다시 치근댄다. 얼마 뒤 그가 총기로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도밍게스 판사는 딸과 어머니를 동시에 용의선상에 올린다.

베키는 반지하방에서 태어난 여왕이다. 그녀의 혈관에는 왕족의 푸른 피가 흐른다. 지하방 벽 꼭대기에 뚫린 창으로 지나가는 화려한 색깔의 하이힐 굽들을 눈으로 좇으며 위대한 미래를 꿈꾸었던 베키는 인기 절정의 디바로 성공했다. 남자를 만나 결혼도 하고 딸 레베카도 낳지만 그녀는 여전히 우주의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다. 마리사 파레데스가 연기하는 베키는, 조앤 크로퍼드나 베티 데이비스 같은 오만한 여신들의 자매다. 자서전을 몹시 공들여 집필하는 그녀들의 대단한 자존심과 자기애는 알게 모르게 타인까지 설복한다. 베키의 딸 레베카는 대표적인 희생자. 엄마를 향한 애착과 질투로 삶을 버티고 결국 그녀만큼 베키에게 매혹된 여장 가수와 정착한다.

베키가 위풍당당할 수 없는 유일한 분야는 모성이다. 12년 만에 만난 딸과 포옹하자마자 귀고리에 걸리는 머리칼부터가 흉조다. 엄마의 하이힐 소리가 들릴 때까지 잠들지 못했던 레베카는 엄마가 맘껏 활동하도록 의붓아버지의 죽음을 부추기고, 엄마를 이기기 위해 베키의 옛 연인을 골라 결혼했다. 그러다 승산없는 경쟁이 지겨워져 방아쇠를 당긴다. 수심에 찬 엄마는 충고한다. “얘야, 남자들하고 문제는 그렇게 해결하면 안 된단다.” 마침내 베키는 멋진 여자로서 산 50년을 마무리짓고 멋진 인간이 되리라 결심한다. 분위기 전환도 할 겸. 죽음의 침상에서 딸을 위해 명예를 희생하기로 결단하는 순간에도 베키의 감정은 관객을 의식한 비장한 퍼포먼스 같다. 사실 그것은 연기이자 진정이다. <스텔라>는 딸의 행복에 제물이 된 어머니의 희열을 예찬했고 <밀드레드 피어스>는 한 남자와 엮인 모녀의 재앙을 계고했지만 두 영화의 스토리를 빌려온 <하이힐>은 베키 같은 여왕이 있어서 해피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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