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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들 [2]
김혜리 2003-04-18

…그리고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유괴범 리키부터 간호사 베니그노까지,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인물탐구

지독한 근시가 보기에도 알모도바르 영화는 현란하다. 물방울과 격자 문양, 빨간 라바 램프, 샤넬 정장, 가발과 하이힐이 눈을 찌르고 더글러스 서크의 멜로드라마, 테네시 윌리엄스의 연극, 잉마르 베리만의 대사, 피나 바우쉬의 댄스가 구석구석에서 더운 숨을 내뿜는다. 그러나 그 모든 가구를 들어내더라도 알모도바르의 방은 여전히 휘황할 것이다. 그 이유는 알모도바르가 창조한 여자들과 남자들 때문이다. 이성애자,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섹슈얼, 그들은 모두 말과 행동으로 격정적인 아리아를 부른다. 예술이 표현의 자유를 만끽하고 확장하는 작업이라고 말할 때 표현의 자유란 결국 인간성 표현의 폭을 일컫는 것이 아닐까. 여기 훌륭한 사례들이 있다.

“내가 죽는 모습도 보여주고 싶어” <마타도르>(1986)의 디에고와 마리아

부상으로 은퇴한 투우사 디에고는 투우아카데미에서 지망생들을 가르치고, 밤이면 고어영화를 보면서 성적 흥분을 맛본다. 디에고의 생도 앙헬은 광적인 신자인 어머니한테 길들여진 유약한 청년. 게이가 아니냐는 디에고의 말에 발끈한 앙헬은 디에고의 애인 에바를 강간하려다 실패하지만 자수를 고집하고 최근의 연쇄살인도 자기 짓이라고 우긴다. 과거에 링에서 피흘리던 디에고에게 열광했고 여전히 죽음에 집착하는 변호사 마리아는 앙헬의 사건을 맡아 디에고에게 접근한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꾸민 침실에서 평탄한 남녀 관계, 평범한 섹스는 멸종 위기의 동물만큼이나 희귀하다. 하지만 죽임과 죽음으로 절정감을 맛보는 <마타도르>의 남녀는 알모도바르의 인명록에서조차 ‘특별 언급’의 가치가 있다. 죽이지 않고는 살아 있음을 실감하지 못하는 투우사 디에고와 변호사 마리나에게 죽음은 이승 최고의 미약(媚藥)이다. 디에고는 부상으로 모래밭을 떠난 이후 결핍감에 시달리며 고어영화의 사지절단 이미지로 욕망을 어른다. 마리아는 만나는 모든 남자에게서 피흘리는 투우사의 모습을 찾아헤맨다. 그리고 정사 도중 남자의 척추를 찔러 절명시키는 순간마다 마타도르(소를 찔러죽이는 주역 투우사)의 포즈를 마음에 그린다. 두 남녀에겐 이렇다 할 심리적 동기도 없다. 마드리드로 상경하자마자 투신자살하는 사람을 보았다는 희미한 추억이 고작이다. “우린 죽음에 사로잡혀 있어. 피하려고 해도 소용없어”라고 말하는 디에고가 보기에, 인간의 악이란 독버섯의 독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 독버섯한테 독의 정당성을 이러쿵저러쿵 추궁해봤자 소용없다. 마리아가 묻는다. “내가 죽는 모습을 보고 싶어?” 디에고는 답한다. “내가 죽는 모습도 보여주고 싶어.” 그들은 한번 울고 죽는다는 천생연분의 가시나무새와 같다. 단 한번의 완벽한 희열을 위해 둘은 벽난로 앞에 투우사의 망토를 깔고 장미꽃을 뿌린다. 실소를 자아낼 만한 ‘허례허식’이지만 지독히도 진지해서 웃음이 목에 걸린다.

디에고와 마리아는 살아 있는 인간이라기보다 인간의 형상을 한 심리적 충동에 가까운 캐릭터다. “<마타도르>는 내 영화 중에서 가장 구체적인 주제, 즉 감각의 쾌락을 다루는 가장 추상적인 영화다”라고 알모도바르도 후일 확인했다. 정신분석을 공부하지 않아도 <마타도르>에서 타나토스와 에로스의 병치는 촌스럽게 선명하다. 투우사는 죽이는 방식이 훌륭해야 한다며 디에고가 도살의 묘를 강의하는 장면에서 소의 도살과정은 남녀가 엉키는 신과 교차편집된다. 반면 성적으로 미숙한 청년 앙헬은 피만 보면 기절하고, 에바는 디에고가 연쇄살인과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마리아에게 듣자 더욱 집착한다. 마지막 살인현장에 도착한 경찰들도 디에고와 마리아의 완전 연소된 열정을 시샘하는 것처럼 보인다. 디에고와 마리아의 욕망이 광원이라면, 세상의 모든 성애는 광원에서 새어나온 빛이 만든 그림자에 불과하다.

유괴라는 이름의… 사랑

<욕망의 낮과 밤>(1990)의 리키

정신병원에서 정식으로 세상에 나온 리키는 1년 전 탈출했다가 만난 포르노 배우 마리나를 찾는다. 세상을 달리 보게 만든 마리나를 사랑하는 리키는 그녀와 가정을 꾸릴 심산이다. 그러나 포르노계를 나와 쇠락한 노장감독의 마지막 영화에 출연 중인 마리나는 리키를 거절한다. 리키는 마리나의 아파트에 침입해 사랑을 받아줄 때까지 그녀를 감금한다.

제발 날 좀 봐줘! 젊은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까맣게 젖은 눈동자가 비명을 지른다. 3살 때 고아가 되고 8살에 고아원을 탈출해 16살에 정신병원에 갇힌 리키는, 평생 자기를 바라봐주는 눈을 가져본 적이 없다. 한편 서커스 출신의 포르노 배우 마리나는 평생 구경거리로 살아온 여자다. 그러나 누가 ‘진짜’ 그녀를 보았는가? 마리나를 향한 숱한 시선들은, 솜씨좋은 리키의 그림과 건장한 육체만 보았지 그의 눈은 들여다보지 않았던 병원 여원장의 눈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리나만이 자기를 미치게 만든 세상에서 그를 정상으로 살게 할 수 있다는 리키의 믿음은, 지구에 관한 갈릴레오의 신념만큼이나 확고하다. 날 잘 보기만 하면 당연히 사랑할 텐데! 생사를 쥔 유괴범이 돼서야 마리나의 주의를 끈 리키의 브리핑은 간결하다. “난 스물셋이고 혼자고 5만페세타가 있어. 좋은 남편과 아빠가 될 거야.” 존 파울즈가 그린 <콜렉터>의 지중해 버전인 리키의 무기는 적반하장이다. “언제나 돼야 나를 사랑할 거야?”라며 쓰다듬어 주지 않으면 물어뜯을 강아지처럼 으르렁거리고, 마리나가 전생의 언약을 잊은 연인이나 되는 듯 다그친다. 마리나는 설복당한다. 부드러운 재갈을 찾고 수도꼭지를 수리해준 배려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가진 게 없으니 두려울 게 없다는 남자처럼 그녀도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납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구애에 화답한 마리나는 가볍게 말한다. “집에 가면 납치 얘긴 말아. 엄마는 모르시니까.” 사랑으로 유괴를 정당화하는 남자에게 돌을 던질 것이냐의 물음은 마리나보다 비평가들에게 훨씬 골치 아팠다. 의외로 리키의 교훈은 간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잠시 시계추를 멈추고 커튼을 내리고 인간을 충분히 응시할 시간을 가질 수만 있다면, 누구에게나 사랑은 지척에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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