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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풍산부인과>에서 <보리울의 여름>까지,박영규 스토리 [2]

난 정말 럭키한 사람

“만일에 <순풍산부인과>랑 만나지 않았다면 박영규라는 배우의 인생이 그냥 그런 배우로 지속됐을지도 몰라요. 럭키한 거지. 하지만 누구나 기회는 온다고 생각해요. 기회가 오는 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기회를 놓친다구. 그런데 미달이 아빠는 내가 한번 나를 부숴보고 싶은 욕망이 있을 때 왔어. 그게 절묘한 거야. 운명이. 코미디를 난 극단 목화에서 오태석 선생님하고 할 때 다 공부했다구. 오늘날 박영규의 세계는 그분이 만들어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 그때 만약 그런 공부를 안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이렇게 안 됐을 거라구. 사람이 자기가 투자하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승화될 타이밍이 온다고. 자기가 바친 만큼 반드시 온단 말이지. 하지만 그때 훈련을 안 했으면 이렇게 안 됐을 거야. 그래서 내가 굉장히 럭키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순풍산부인과>와 <똑바로 살아라>의 김병욱 PD는 당시 캐스팅 1순위로 박영규를 떠올린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미리 알고 지내던 사이도 아니었고 첫 녹화에 들어가기 이틀 전에 전화를 했고 이야기를 하면서 뜻이 통했다는 것이다. “당시가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나던 때라 풍요 속에 비참하게 사는 사람을 그려보자는 생각을 했다. 밖으로 보기엔 화려하지만 자기 맘대로 처분할 수 있는 물건은 하나도 없는 사람을 그리자고. 그런 부분에 의견이 일치했다.” 이것이 박영규의 말대로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는 운명적인 캐릭터인 것일까? 분명한 사실은 그때 이미 그의 내면에 미달이 아빠의 모습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는 점이다.

"슬프니까 웃기는 거야"

“어렸을 때, 1년에 1번 아버지 생신 때 돼지고기가 올라와요. 눈이 뒤집히는 거야. 핑 돌아. 밥상 올라오면 바로 젓가락 올라가잖아. 뒤통수 팍, 형이야. ‘상놈의 새끼, 너만 먹어, 같이 먹어야지.’ 그럼 그 다음엔 다시는 고기를 안 먹어. 토라져서. 고기는 절대 안 먹고 장아찌만 먹어. 그럼 또 한대 팍, ‘너 지금 엉기는 거야. 고기도 먹고 장아찌도 먹어. 너 지금 나한테 댐벼.’ 그럼 울면서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고. 그런 기억들이 미달이 아빠를 만든 나의 삶이야. 그런 인생을 살았어. 그런데 난 그게 아름답다고 생각해. 어떻게 배고픈데 눈에 보이는 게 없는데 다 같이 먹자, 그럼 애가 아니지. 그러니까 본능에 정직했단 말이야. 유난히 난 그게 셌어. 막내, 기질 자체가 막내야. 그런 삶을 살면서 철없는 행동을 해. 지금도 고스톱치면 ‘돈 따면 개평 없기로 하자, 개평달라고 하면 돌로 머리를 찍자’ 그래. 그런데 내가 지잖아. ‘자식아, 개평 좀 줘라’ 그러지. 그럼 그놈은 정말 밖에 가서 돌을 들고 와서 머리를 찍으려고 그래. 그럼 난 도망가고 그놈은 아파트를 빙빙 돌면서 쫓아와. 그런데 그게 나쁜 게 아니야. 친구 사이엔 그런 게 사랑이더라구. 그럴 때 행복하더라구. ‘그럼 잘 쳤어’ 하고 툭툭 털고 일어나면 그게 뭐가 재미있어. 재단하듯 선을 그어서 살면 인생이 재미없다고. 어른이라는 미명하에 젠틀하게 그러면.”

짐작하겠지만 그의 경험담은 극 속에서 박영규가 연기한 인물들과 다르지 않다. 가난해서 슬프고 힘들지만 그는 그걸 웃음으로 포장할 줄 안다. 단지 연기만이 아니라 현실의 인터뷰 자리에서도. 최근 방영된 <똑바로 살아라>의 에피소드 하나를 떠올려보자. 극중 영규는 우연히 옛 애인을 만난다. 양수리에 가자는 옛 애인의 제안을 받고 영규는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보지만 아무리 모아도 9만원 남짓. 자동차에 휘발유 넣고 남은 돈은 7만원. 카페에서 만난 그녀는 비싼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옮겨가보니 스테이크 하나에 3만원. 애써 배고프지 않은 척 자기는 김치볶음밥을 먹겠다고 주문하는 영규. 수중에 돈은 자꾸 없어지고 그의 머릿속엔 중년의 로맨스를 즐길 여유가 사라지고 만다. 그날 밤 영규는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들이켜며 복받치는 설움을 참지 못해 절규한다. “어떤 놈들이 바람 피우는 줄 알아. 돈 있는 놈들이 피우는 거야. 돈.” 과연 이런 영규에게 구두쇠라고, 좀팽이라고 욕할 수 있을까? 슬픔과 웃음이 공존하는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박영규의 연기는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든다.

<똑바로 살아라>

<주유소 습격사건>

라이프에서 안 되면 연기에서도 힘들어

“지금 인터뷰를 하고 있지만 난 이 모습을 누가 보고 있다고 생각해요. 카메라가 지금 이걸 찍고 있다고. 지금 내 연기가 보고 있는 사람한테 감동을 줘야돼. 왜? 내 생애라는 필름을 돌리고 있는 거니까. 그게 기승전결이 절묘하고 그러면 나한테 박수치고 그럴 거 아니야. 그렇게 될 때 극중극에서도 똑같이 되는 거야. 여기서 안 되는데 저기서 되고 그런 거 안 돼. 천만의 말씀이야. 배우가요. 라이프, 삶에서 안 되면 연기에서도 안 되는 거야. 이게 돼야 저기도 돼. 열심히 연기하는데 마음에 안 와닿는 거 있잖아요. 하지만 난 내 삶이 그냥 미달이 아빤데 뭐, 여기서 다 끝났어요. 그런 생각과 철학을 갖고 있고. 그러니까 연기는 진짜로 해야 하는 거예요. 흉내내고 만드는 게 연기가 아니야. 내 진실이고 내 생명을 바쳐서 하는 거야. 미달이 아빠는, <똑바로 살아라>의 영규는 나야. 내가 그 사람이야. 나를 보고 웃는 이유는 저 사람은 저걸 연기로 하는 게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야. 왜? 그 모습이 너무 절실하니까. 가슴 아픈 그 절실함이 코미디고 트래저디지. 비극과 코미디는 그러니까 쌍둥이야. 진실이 인볼브 안 돼 있는 건 안 되는 거지. 다 거짓말이야. 진실이 들어 있을 때 웃는 거라구요.”

실제로 박영규가 인터뷰하는 모습은 연기할 때와 똑같다(그의 말투를 가급적 그대로 살려서 쓰는 이유도 그것이다). 이날 첫 번째 질문을 꺼내기까지는 30분이 걸렸다. 미처 질문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연기철학을 말하기 시작했고 한번 물꼬를 튼 이야기는 무너진 댐에서 솟아나듯 콸콸 쏟아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앉았다, 웃었다 울었다, 영화와 드라마의 한 장면을 그 자리에서 재연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자신이 진행하는 <가요콘써트> 이야기를 하면서 노래를 부른 것(그 노래를 들려줄 수 없어 정말 유감이다). <그대 그리고 나>를 불러서 기립박수를 받은 이야기를 꺼낸 그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푸른 파도를 가르는 흰 돛단배처럼 그대 그리고 나…” 하며 노래를 한다. 그냥 한 소절이 아니라 거의 노래 한곡을. 미달이 아빠가 몸이 원하는 본능에 충실한 인간인 것처럼 박영규는 몸에서 우러나는 쇼맨십에 충실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 점이 코미디 연기로 널리 사랑받게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연애를 해도 대충 안해

“노래도 하나의 연기라고 생각해. <가요콘써트> 진행을 하는 것도 연기의 감정을 만들려고 하는 건데. 노래를 해도 난 로맨틱한 감정, 작곡, 작사가의 심정을 담아서 그림을 그려주면서 노래한다고. 리허설이고 본방송이고 생명을 다 바쳐서 노래해. 눈물 막 쏟아진다니까. 안 그러면 노래를 왜 해. 그 감정을 갖고 행복하려고 하는 거 아니야. 안 그럼 뭐 하러 노래해. 노래하지 말라고. 어디서나 최선을 다 해. 밤무대 해도 나 한번 쓴 데는 반드시 다시 불러. 다시 부르게 돼 있어요. 한번 써보면 열심히 하는 게 보이니까. 최선을 다하니까. 자기가 선택한 초이스를 왜 대충해. 왜 대충 살어. 이건 잘하고 저건 대충하고 그러면 안 돼. 밥을 먹어도 열심히 맛있게 먹어야지. 연애를 해도 대충 안 해(자기가 한 말에 흠칫 놀라는 표정 연기). 에이, 그렇단 얘기지. 만일에 혹시나 연애를 하면 그렇게 한다는 얘기지.” (웃음)

지난해 여름, 박영규는 전북 김제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영화 <보리울의 여름>을 찍었다. 보리울 어린이 축구팀의 감독이 되는 우남 스님은 미달이 아빠 같은 치사한 면을 갖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극 전체가 잔잔한 리듬을 타고 흘러가는 이 영화에서 그는 전보다 조용하고 느긋하며 여유롭다. 이민용 감독은 캐스팅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시나리오를 읽고 만나고 싶다는 전화가 왔다. 박 선배가 요즘 같은 때 이런 영화를 만들겠다고 하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다며 만나자고 했다. 작품이 마음에 든다며 상업적 성패에 상관없이 하고 싶다고 했다.” 박영규는 <보리울의 여름>에서 극단적 변신은 아니지만 미달이 아빠 캐릭터가 도달할 수 있는 또 다른 영역을 보여준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과 깨달음의 경지가 함께하는 우남 스님은 박영규가 웃음을 주는 배우만이 아니라 삶의 깊이를 표현할 수 있는 배우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