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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이스트만 단편영화 제작지원작 발표 [3]
박혜명 사진 조석환 2003-04-25

“부녀관계에 희망을”

<자전거 경주>의 박은교 감독

<자전거 경주>는 현재의 딸이 과거의 아버지를 만난다는 독특한 상상에서 시작된다. 이 시나리오를 쓴 박은교(27)씨는 막연히 영화일을 하고 싶던 고등학교 시절 겁은 많고 욕심은 없어서, 부모님 몰래 영상원에 응시했다가 2차에서 탈락하고 순순히 법과대에 진학했다. 그러나 영화 동아리 활동만으론 목마름이 달래지지 않아 결국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도전했다. 그리고 지금 영상원 연출 전공 졸업반이다. 일상에서 갑자기 받는 깜짝 선물처럼 지극히 리얼한 영화가 주는 판타지를 좋아하는 그는, 졸업작품을 염두에 두고 공모 마감 전날 후딱 써내려간 시나리오가 당선돼 아직도 실감이 안 난다고 했다.

-작품을 구상한 계기는.

=아버지가 워낙 보수적이신데다 자기 생각이 확고한 분이다. 그런 아버지한테 내가 딸이기 때문에 인정받지 못한 부분들이 항상 섭섭하고 속상했다. 그런데 한번은 엄마가 “너 어릴 때 아버지가 무척 예뻐하셨다. 아장아장 걷는 너를 안고 1시간을 걸어서 동물원에 데려가신 적도 있어”라고 하시는데 그 말이 안 믿기더라.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날 예뻐하시던 과거의 아버지와 지금의 내가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 무슨 얘길 할 수 있을까. 그리고선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버지와 그 자전거를 쫓는 내 모습이 이미지로 떠올랐다. 그 이미지만 막연히 갖고 있다가 시나리오로 쓴 거다.

-일반적으로 딸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많이 얘기된다.

=엄마는 나와 동성이다. 그래서 딸들은 커가면서 엄마를 나와 같은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 본질적으로 이해의 여지를 갖고 있다는 거다. 딸이 엄마에 대한 연민을 쉽게 갖는 것도 그런 이유다. 하지만 아버지는 남자다. 이성간에는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 상대방을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벽이 존재한다. 나는 그걸 해결해보고 싶었다.

-다큐를 함께 작업한다고 했다.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아버지의 집>이란 다큐를 보면서 세상 아버지들은 다 딸들한테 비슷한 말을 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한국의 부녀를 소재로 다큐를 만들어도 재미있겠다 싶었다. 개인적으로도 도움이 되고. 하지만 말 그대로 아직 구상 단계고, 결론도 정해지지 않았다. 다만, 희망을 주고 싶다. 부녀관계에 존재하는 어쩔 수 없는 간극은 수용해야겠지만 그래도 좋아질 수 있다는 희망에 기대를 건다. 이건 내 바람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에 각별한 관심이라도.

=원래 다큐를 좋아한다. 굉장히 리얼한 장르이면서도 다큐는 판타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동시대인들의 삶이면서 내 인생에 없는 이야기를 통해 감동을 받기 때문이다. 진짜 삶이 더 영화 같다고들 하듯이, 현실에서는 영화보다 더 강도높은 일들이 벌어진다. 그걸 다큐로 옮기면 판타지가 된다고 본다. 또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처럼 일상인데도 판타지 같은 순간들이 존재하는 영화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처럼 판타지가 현실처럼 흘러가는 영화들도 있다. 완전한 판타지보다 그런 판타지들이 오히려 설득력 있고 선물 같기도 하다. <자전거 경주>도 그런 맥락의 구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자신의 영화가 줄 수 있는 판타지는 뭔가.

=과거의 아버지를 만난다는 것. 그때의 아버지와 얘길 나눠보면 아버지를 감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만남 자체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겠지만, 아버지는 내가 이해할 만한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고 싶다.

-제목은 어떻게 지었나.

친구가 지어줬다. 자전거 경주장면이 나오기도 하고, 재미도 있다고. 잘 지었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딸과 과거의 아버지의 만남이 모티브가 된 영화이기도 하니까.

<자전거 경주>는 어떤 영화?

아빠, 나란 걸 알았어요?

서울서 독립해 사는 30대의 은수는 유학문제를 상의하러 고향에 내려왔다가, 아버지로부터 집안 사정 생각 안 하고 저 잘난 줄만 안다는 말만 듣는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크게 다투고 화가 난 은수. 시간은 거꾸로 거슬러 은수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그림 그리며 노느라 정신없던 은수는 엄마한테 숙제 안 한 핑계를 대느라 꾀병을 부리고 엄마의 병간호를 받는다. 아픈 딸이 먹고 싶은 볶음밥을 사러 은수 아버지는 중국집에 들르기로 한다. 자전거를 타고 골목길을 쌩쌩 달리는 은수 아버지.

유학문제로 아버지와 말다툼하고 나서 몹시 마음이 상해 밖에 나와 있던 은수는 그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죽어라 달려 아버지의 자전거를 쫓아가는 은수. 중국집에서 볶음밥을 사는 중이던 어린 시절 은수의 아버지는 성인이 된 은수를 남 보듯 하고, 은수도 아버지 앞에서 뭐라 더 말을 잇지 못하다가 그냥 돌아서고 만다. 그런데 볶음밥을 사 들고 집에 돌아온 은수 아버지는 어린 은수와 이야기하던 도중, 아까 본 그 처녀가 자신의 딸이라는 걸 무의식 중에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