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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이스트만 단편영화 제작지원작 발표 [2]
박은영 사진 조석환 2003-04-25

“소외된 이들에 대한 예의”

<세라진>의 김성숙 감독

김성숙 감독의 영화는 그의 삶이고 역사다. 칸영화제 단편부문에 초청됐던 <동시에>는 청계천 노동자의 일상에 욕망의 이중성을 투사하고 있다. 감독 자신이 “혁명은 이뤄진다”는 확신으로 4년간 머물렀던 노동현장에서의 경험이 영화의 바탕을 이뤘다. 이번 코닥이스트만 지원작으로 선정된 <세라진>도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 군부대 근처에서 만난 매춘 여성들에 대한 기억이, 미군의 매춘부 살해 소식을 통해 되살아나 <세라진>으로 이어진 것. 김성숙 감독은 “영화를 프로파간다로 만들 게 아니라” 사랑과 욕망이라는 인간의 보편적 주제에 집중하겠다고 밝힌다. “사회성이 강한, 민감한 소재를 통해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주제로 뻗어나간다”는 원칙 그대로.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연출과 시나리오를 공부하는 중에 잠시 방한한 김성숙 감독을 만났다.

-<동시에> 이후 작품활동을 기대한 이들이 많았는데, 돌연 유학을 떠났다.

=답답하더라. 영화를 만들어놓고도 잘 안 봤다. 드라마를 다루는 데 역부족이었다는 아쉬움도 들고. 한국에서 영화를 공부하려고 했는데, 나이 제한 등을 이유로 지망했던 학교에 떨어졌다. 인디포럼영화제랑 독립영화협회에서 일하기도 했는데, 정작 나 자신에 대해 생각 못하고 줄곧 떠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나를 둘러싼 조건과 환경을 바꿔보고 싶었다. 그래서 가게 된 곳이 뉴욕이다. 학교에선 시어터 예술의 어떤 흐름이 영화에 접목됐는지, 연기자 그리고 대중과 호흡하는 연출이란 무엇인지를 배워가고 있다.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을 보고, 바와 클럽에서 다양한 음악을 접하면서, 예술에 대해 얼마나 배울 게 많은지를 새삼 실감하고 있다.

-<세라진>은 어떻게 착안한 작품인가.

=몇년 전 신문에서 기지촌의 60대 매춘부가 미군 병사에 살해됐다는, 단 한줄짜리 뉴스를 읽었다. 나는 이 슬픈 이야기를, 그녀가 죽던 날 하루로 한정해, 욕망의 고리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해보고 싶어졌다. 젊은 미군이 술에 취해 늙은 매춘부에게 자신의 욕망을 배출한다. 그는 욕망 때문에 대상을 오해했고, 그 분노로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발자크의 <사라진느>, 롤랑 바르트의 <S/G>와 연결해 생각해봤다. 아름다운 여인의 초상화 옆에 초췌하고 늙은 할아버지가 서 있는데, 이들이 동일 인물이라는 설정. 그 그림은 젊은 시절 여장 가수였던 할아버지를 사랑한 화가의 작품으로, 그의 욕망을 투여한 이미지다. 욕망하는 순간 보이는 것과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극명한 이미지의 대조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인 기억과 맞물린 작품이라고 들었다.

=늙은 매춘부의 살해 뉴스를 접하고 감회가 새롭달까,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그녀의 젊은 시절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 나는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미군 부대와 공장과 골프장 등이 함께 들어선 동네에 살았다. 공주처럼 예쁜 언니들에게 돌을 던지고 양갈보라 놀리곤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들에게 이 사회가, 우리가 준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늙으면 매춘도 할 수 없고, 사회로 돌아갈 수도 없다. 출구가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 인생의 끝을 예감하고 자신을 놓아버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티를 배제하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만들어보일 생각인가.

=세라진의 마지막 화장을 제의(ritual)처럼 그려보이고, 그 사이사이에 사건과 생각들을 끼워넣을 생각이다. 배우가 매우 중요한데, 세라진 역할의 배우는 할머니 같아야 하고 동시에 섹시하기도 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미군 병사의 눈에 비친 세라진의 모습, 그 환상과 현실의 간극을 커버하는 일이다.

-<동시에> <세라진>, 모두 사회 주변부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다.

=최근 한국에 반미 감정이 팽배해 있다는 걸 몰랐다. 그런 분위기가 부담스럽고 싫다. 영화 자체가 잘못 읽혀질까봐 겁이 난다. 이건 반미영화가 아니니까. 내가 관심을 갖는 소재는, 의도하지 않아도 언제나 사회성이 강하고 민감한 것들이다. 소외된 이들에 대해선, 애정까지는 모르겠지만, 예의는 갖추려고 한다.

-감독의‘단편영화관’은 어떤 것인가.

=이번 <세라진>의 경우는 단편에 어울리는 아이디어라고 확신한다. 장편으로 만들라면,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을 거다. 여러 가지 상황이 널려 있다면 그중에서 하나의 압축적인 풍경을 끌어내는 게 단편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단편과 장편의 아이디어는 다를 수밖에 없다. 장편용으로 <하마에게 물리다>(가제)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를 써놨는데, 때가 되면 영화화하고 싶다.

<세라진>은 어떤 영화?

그녀의 파라다이스, 현실보다 추한

기지촌 여성 세라진은 한때 사랑받았고 아름다웠지만, 이제 예순이 넘어 외롭고 곤궁하게 살아가고 있다. 기지촌을 벗어나 새로운 생활을 꿈꾸기도 하지만, 주민등록마저 말소된 그녀를 받아줄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기지촌으로 되돌아온 세라진은 짙게 화장하고 곱게 차려입은 뒤 ‘파라다이스’ 클럽을 찾아가 술 취한 어린 미군을 유혹한다. 함께 밤을 보낸 뒤, 세라진은 화장이 지워진, 늙고 추한 자신의 얼굴을, 미군에게 보여준다. 당혹감과 분노에 사로잡힌 미군의 손에 세라진은 목숨을 거둔다. 행복한 미소를 띤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