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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 바우쉬의 <마주르카 포고>
2003-04-28

리스본 항구에서 이 밤을

피나 바우쉬 무용단을 만나는 순간을 기다리는 마음, 그들의 움직임을 기다리는 마음, 그들의 마음을 기다리는 마음, 그들의 열정을 탐닉하려는 마음, 뜨거움과 너무도 차가운 순간들이 격돌하는 공간들, 긴 머릭카락 사이로 뿜어져나오는 바다 내음새. 긴 치맛자락은 어느새 철새가 되어 뛰어 날아오르고 지구 저편의 소식을 물어온다.

뼈 마디마디에서 울려퍼지는 탱고울음

누가 4월은 잔인한 달이라 했는가? 긴 잠에서 막 깨어난 의식은 남국의 햇살과 바다, 그리고 이국적인 문화를 만나 충돌하고 춤춘다. <마주르카 포고>는 이렇게 우리를 파고든다. 거대한 바위 절벽 아래서 이들이 만들어내는 도발적인 아름다움은 웅장하기까지 하다. 객석으로 넘쳐흐를 것 같은 바위 절벽 위에서 한 남성 무용수의 터질 것 같은 질주로 시작되는 도입 부분부터 우리는 이미 이 가상의 공간이 우리를 어떻게 이끌어 갈지 예감한다. 브라질의 삼바음악이 관객의 눈을 유혹하고 흔들리는 영상 너머 리스본의 태양을 만진다. 격정적인 키스는 메말라버린 우리의 피부를 적시고 다물어진 입술 사이로 꽃을 피운다. 도시의 태양이 무색해지고 탈진된 정열은 꿈틀거린다. 도둑맞은 욕망을 닭이 쪼아댄다. 나의 머리는 통증을 느끼며 동시에 기지개를 편다. 피나 바우쉬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대들이여! 삶의 절망 끝에 숨겨진 이 여유로움을 만끽하라! 명령형.

브라질 왈츠에 맞추어 흔드는 그들의 발자국은 우리를 달래고,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는 소녀의 절규는 지나간 시간을 붙잡아 허공에 매달아놓는다. 삶이 절박하다. 외쳐라. 절벽이 흔들린다. 지축이 흔들린다. 빼앗긴 희망이 달려온다. 안녕하세요? 손을 잡고 흔들고 타협을 불러온다. 사랑하라. 숨막히는 질주 사이로 허점이 보이고 창백한 공간이 보이고 그 사이로 음악이 흐르고 그 사이로 꿈틀거리는 욕망이 보인다. 당연하다고 여기던 그 인연들이 낯설어 보이고 정답던 사실도 너무도 생소해지는 이 현실을 그녀는 용감하게 우리에게 요구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긴 이야기를 경청하며 때론 긴 수면에 빠진다. 때론 잔인하기까지 한

긴 대화. 왜 슬픈 음악의 음율에 우리의 가슴은 찢어지는가? 회색빛 드레스에 웅크리는 숨어 있는 검은 비밀에 우리는 귀기울인다. 아! 아! 작은 것과 큰 것들의 차이를 조용하게 바라보게 하며 서로 다름의 간격을 포옹하게 한다.

쉼없이 마주치는 엇갈린 대화들, 벽에 부딪히며 우리에게 다시 질문한다. 용서없이 생기는 여분의 파장들…. 삶이 이토록 거짓없이 포장되어질 수 있을까?

내가 피나 바우쉬의 작품을 가슴깊이 끌어안는 이유는 이러한 일상을 너무도 자연스러우면서 강제적으로 우리에게 질문하는 이중성에 있다. 이런 그녀를 가끔 서울 하늘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행운이다. 불과 몇년 전에는 늘 그녀를 뉴욕에서만 만날 수 있었다. 그녀와 함께 긴 인생을 같이 행진하는 단원들의 짙은 여정도 나를 눈물나게 한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모험을 함께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그녀에게 주어진 큰 행운일 것이다. 파도가 자기 높이의 인생을 노래하고, 물개가 농담을 하고, 인어들이 합창을 하고…. 인생은 아름답지 않는가? 적어도 오늘만큼은…. 부둥켜안고 함께 대화할 상대를 찾아 이 밤을 걸어보자. 리스본 항구에서.안은미/ 대구시립무용단 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