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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의 나라> 통해 본 요즘 드라마 속 부모들

애미 에비가 무슨 죄라고

<술의 나라> SBS 매주 수·목 밤 9시55분

집을 나갔던 어머니, 아버지들이 돌아왔다. 이른바 ‘홈드라마’가 주를 이루던 시절 당당하게 안방을 차지했던 부모들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건 1990년대 초. 드라마 <질투>가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뒤 국내에 트렌디드라마가 ‘주류’로 자리매김하면서부터다. 부모가 없는 집에서 아들딸들은 훨씬 자유로웠다. 무엇보다 사랑과 이별, 동거와 동침, 결혼과 이혼 등 연인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사건과 사고’들을 새로운 가치관에 입각해 처리하는 데 부모의 동의를 구하거나 반대에 부닥칠 염려가 없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지리멸렬하거나 구구절절할 필요가 없으므로 장편보다는 중편(미니시리즈) 드라마 형식을 띠었고, 신선한 소재와 실험성이 돋보이는 중편 드라마들이 속속 등장했다. 드라마상에서 부모의 부재는, 젊은이들이 이전 세대에 대해 단절의 욕구를 갖고 있으며 다른 가치관과 문화, 삶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다소 ‘거칠게’ 방증한 셈이다.

그런데 ‘슬그머니’ 부모가 돌아왔다. 유명한 중견배우들이 한주에 몇번씩 겹치기 출연을 해도 그 아버지가 저 아버지인지, 이 어머니가 아까 그 어머니와 어떻게 다른지 굳이 따질 필요가 없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부모’의 존재가 트렌디드라마에서도 제법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들의 면면이 홈드라마 시절만큼 위풍당당하지는 않다.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아들딸에게 만날 호통을 듣는다. “왜 나를 낳았고, 왜 나를 버렸으며 사랑해주지 않았느냐”고. 때론 “왜 가난을 대물림하고 실패 앞에 좌절했느냐”는 극히 자존심 상하는 지적을 받기도 하고, “왜 친구를 배신하고 사랑하는 여자를 버렸느냐”며 따지는 통에 뒤늦게 회한에 잠겨야 하는 경우도 있다.

모처럼 돌아온 부모들이 이처럼 궁지에 몰려야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 부모로 인하여, 부모의 어리석음과 우유부단함과 교활함으로 인하여 아이들이 상처를 받고 배배 꼬인 삶을 살아야 하는 탓이다. 요즘 SBS에서 방송하는 <술의 나라>에 등장하는 부모들을 보자. 전통주를 제조하는 뼈대있는 가문에서 머슴처럼 일하다 주인을 배반하는 대가로 부귀영화를 차지한 서태관(길용우)은 <올인>의 최도환(이덕화)과 함께 ‘아비는 종이었다’ 유형에 속한다. 이들의 2세는 아비를 쏙 빼닮아 사악하거나 아무것도 모른 채 천친무구하게 자라거나 둘 중 하나지만 어느 쪽이든 ‘아비의 업’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와 결합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반면 전통주를 개발하느라 죽을 힘을 다했지만 사악한 친구 때문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이종인(박병호)은 <로망스>의 실패한 청바지 회사 사장인 최장우(현석)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능력 부족’형이다. 이들의 2세는 힘들게 자라지만 워낙 태생이 고귀해 못 먹어도 귀티가 잘잘 흐른다. 게다가 성품도 고결해 사랑 게임에서 종종 승자가 된다.

드라마에 훨씬 더 자주 등장하는 부모 유형은 송 회장(이정길)처럼 툭 하면 아들딸을 무시하고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기대 과잉’형이다(이정길은 <아름다운 날들>에서도 기대 과잉형 아버지를 연기한 바 있다). 이들의 2세는 애정결핍에 시달리며 부모에게 인정받으려고 몸부림친 끝에 ‘독종’혹은 ‘스토커’가 된다. 안락한 삶을 위해 자식을 버린 어머니와 사랑을 위해 친구를 배신한 아버지(<러브 레터>), 자식사랑이 지나져 결국 딸을 ‘악녀’로 만들어버린 어머니(<위풍당당 그녀>), 얽히고 설킨 인연 때문에 청춘남녀의 사랑에 누가 되는 부모들(<겨울연가>외 다수)…. 요즘 드라마 속 부모들은 자식들의 창창한 앞날과 애틋한 사랑을 가로막을 ‘업’을 짓느라 눈코 뜰 새가 없다. 드라마의 갈등구조와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있어 그 부모들은 유일하고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순식간에 죄 많은 아비 어미가 돼버린 부모들도 딱하지만, 그들이 대부분 비슷한 이력과 성품을 지닌 탓에 그 2세들인 드라마 주인공들의 성격과 행동도 쉽게 예측 가능하다는 사실은 더 비극적이다. <술의 나라>의 진부함도 여기서 출발한다. 주인공이 전통주를 빚건 청바지를 만들건(<로망스>) 여성복을 디자인하건(<비밀>) 아무런 차별점이 없는 것이다. 그동안 비슷한 드라마들이 양산된 탓에 이제 아무리 부모를 팔아도 ‘그 여자 그 남자가 만나고 헤어지는 신선한 이유’를 대기가 쉽지 않은 걸까? <술의 나라>는 흔한 소재로도 신선한 느낌의 흥행 드라마를 제작했던 이진석 PD가 관록있는 정성주 작가와 손을 잡은 작품이라 더욱 아쉽다.이미경/ <스카이라이프> 기자 friend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