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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감독 원화평(袁和平)을 만나다 [2]
김현정 2003-05-02

다른 사람의 영역엔 겸손하게, 자신의 영역엔 고집있게

원화평은 1980년대에 무술감독보다 감독으로 더 많은 영화를 찍었다. 그런 그에게 “동작을 짜는 것 외에 촬영이나 편집을 연구하는지” 물었을 때, 그는 “아니, 오직 동작만 생각한다”고 짧게 대답했다. 원화평이 서극과 함께 <황비홍>을 만들어 홍콩영화를 한 고비 끌어올릴 수 있었던 까닭은, 조화를 깨지 않는 창조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원화평이 액션안무만을 맡은 <황비홍>은 그와 인연이 깊은 영화였다. 청조말의 혼란기, 중국인들 마음의 영웅으로 남아 있는 황비홍은 수십년에 걸쳐 영화 속에 등장해왔다. 원소전은 1960년대 <황비홍> 시리즈의 무술감독이었고, 원화평 역시 <취권>과 <철마류>의 이야기 속으로 황비홍을 데려왔다. 서극이 감독한 1991년작 <황비홍>은 이연걸이라는 걸출한 배우를 만나 어느 때보다도 당당하고 기품있는 영웅으로 태어났지만, 원화평이 정교하게 짜맞춘 액션이 없었더라면, 이연걸은 평범한 단신의 액션전문 배우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웬만한 2층 건물 높이에 맞먹는 사다리가 공간을 가로지르고, 벽에 기대섰다가 다시 다리처럼 아래로 떨어져 서로 교차하는 <황비홍>의 유명한 장면은 과연 원화평이 영화적 요소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매트릭스>도 <와호장룡>도, 다른 영화들도, 모두 감독의 요구에 맞춰갈 뿐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원화평이 들려주는 <와호장룡>의 기억은 조금 다르다. “리안 감독은 액션영화를 잘 몰랐다. 그가 찍을 수 있다고 믿는 장면은 너무 어려워서 가능한 한계 아래로 낮춰야 했다. 반면 그가 정말 스펙터클하다고 생각하면서 난감해한 장면은 사실 이 업계에선 흔한 거라고 말해줘야 할 때도 있었다.” <와호장룡>의 주연 주윤발은 “이건 리안의 영화니까 내 식대로 찍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리안 감독이 액션에서만큼은 판정패했다고 증언했다.

<매트릭스>에 얽힌 일화는 원화평이 얻어낸 승리들이 강요보단 상대가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리는 인내에 기초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매트릭스> 이전에는 할리우드에서 일해본 적이 없었던 원화평은 와이어를 당길 때 스탭들이 직접 하는 대신 기계를 사용하라는 할리우드 스탭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촬영 도중 사고가 일어나 와이어 담당 스탭 한명이 크게 다쳤고, 와이어 작업은 다시 원화평의 방식대로 돌아갔다. 할리우드 스탭들은 기술을 추종하지만 원화평은 사람을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은 차가운 기술보다 유효하다. 원화평은 언뜻 단순해 보이는 와이어 작업이 배우의 움직임과 기량에 따라 달라져야 하고,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사람 손에 느껴지는 감각에 성패가 달려 있는 것이다. 원화평이 데리고 다니는 무술팀은 홍콩 시절부터 거느리고 다녔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적당한 교육기관이 없어서 현장을 구르며 일을 배웠다. 하지만 하는 일은 모두 다르다. 와이어에 능숙한 사람들은 배우들에게 와이어 액션을 가르치고, 쿵후를 잘하는 사람들은 쿵후 훈련을 맡는다. 무기를 잘 다루는 사람들은 무기 쓰는 법을 가르친다.” 원화평과 그의 팀은 다른 사람의 영역엔 겸손하게, 자신의 영역엔 고집있게 일한다는 원칙을 지킨다. 그것은 액션에 특수효과가 끼어들 때도 마찬가지다. <매트릭스2 리로디드>엔 네오가 100명으로 자가복제한 스미스 요원들과 싸우는 장면이 있다. 이중 진짜 사람은 단지 몇명뿐이었지만, 원화평은 완성된 장면이 어떻게 나올지 신경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워쇼스키 형제가 최종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격투장면이 어때야 할지 이야기해줬고, 마음에 들면 그 장면을 들고 특수효과를 입히러 갔다”는 것이다. 그는 “와이어 액션이 한계에 부딪혔다고 느끼면 컴퓨터를 사용해 더 흥미롭게 보이도록 만들 수 있다. 컴퓨터와 액션이 합쳐지면 매우 흥미로운 무언가가 태어날 것”이라고 믿는 개방적인 무술감독이다.

“과거를 반복해선 안 된다”

원화평의 이런 태도는 종종 비판을 받기도 한다. 무술감독 룬셩은 “원화평이 할리우드에서 한 작업은 홍콩 시절에 못 미친다. 이전에 그는 흥미롭고 환상적인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특수효과가 중심인 영화에 동양적인 풍취를 더할 뿐”이라고 말했다. 리안 역시 “<매트릭스>의 액션은 원화평의 평균 수준에 못 미친다. 그의 상상력이 특수효과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원화평을 염두에 둔 발언은 아니었지만, <영웅> <철마류>의 배우 견자단이 밝힌 포부도 원화평과 비교가 된다. 본토에서 쿵후를 배운 견자단은 와이어가 눈속임이라고 말하면서 “나는 와이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난 진정한 무술인이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무술의 경지에 한도를 둔다면 그 정수를 놓치는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원화평은 “과거를 반복해선 안 된다”는 말로 자신의 변화를 설명했다. 욕심부리지 않고, 후회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성공을 기대한 적이 없기 때문에 부담도 느끼지 않는다는 그는 많은 일을 좋은 쪽으로 해석했다. 워쇼스키 형제가 <매트릭스>를 카피하는 영화들을 싫어한 것과 달리, 원화평은 “모방의 대상이 된다는 건 어쨌든 행복한 일”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동양적인 색채를 가미할 뿐이라는 비판 역시 원화평에게 이르면 당연한 진리가 된다. “나는 어설픈 퓨전액션을 시도할 생각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매트릭스>가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동양과 서양을 뒤섞는 대신, 동양적인 요소를 군데군데 더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화평이 무조건 타협만 하는 것은 아니다. 원화평은 “내 목적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같은 이야기를 대사가 거의 없이 들려주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검은 옷을 입은 이연걸이 표창처럼 공중을 꿰뚫는 <흑협>이나 주윤발과 장쯔이가 물결처럼 내려앉는 나뭇가지 위에서 부딪치며 수많은 상념을 주고받는 <와호장룡>, 끝을 모르고 휘어지다 뻗어가는 금속비늘 위에 수천년 신화의 무게가 실리는 <촉산전>은 그 꿈을 짐작하게 하는 표본들이다. <필름메이커>는 포스트프로덕션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원화평의 액션을 두고 “원화평은 비현실적인 액션을 믿을 만한 것으로 만든다”고 평했다.

이런 찬사와 영광의 한가운데 있지만, 원화평은 이 모든 것이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믿는다. 그는 “만사는 새옹지마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다. 홍콩 액션영화도 죽어가는 장르가 될 테고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해도 육십을 눈앞에 둔 원화평에겐 아직 더 가야만 할 어딘가가 있을 것 같다. <매트릭스> 시리즈의 제작자 조엘 실버는 “원화평은 워쇼스키 형제의 철학과 이야기를 액션에 녹여낸다”고 평가했다. 원화평 자신은 “난 꿈이 별로 없다”고 했지만, 조엘 실버가 말한 경지에, 꿈이 없는 사람이 다다를 수 있었을까. 원화평이 온화하게 풀어놓은 말들 속엔 성급하게 사라져선 안 될 장인의 꿈이 태극권처럼 느릿하나 힘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낙관과 관용 지닌 대륙인

촬영현장의 원화평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평생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보드리야르와 성경에 짓눌려 있던 <매트릭스> 제작진은 현장을 놀이터처럼 대하는 홍콩 스탭들이 격언처럼 전한 문장을 기억하고 있다. 낙천적이고 소박한, 초서처럼 자유로운 흘림으로 육체를 통제하는 그들은 고된 훈련과정도 대륙의 넉넉한 웃음을 가지고 대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바로 원화평과 고락을 함께해온 무술팀이었다. 학교 선생님처럼 마음 좋아 보이는 원화평은 책임을 강조하면서도 여백을 잊지 않는 사람이다. <매트릭스> 촬영과정을 담은 DVD <매트릭스 리비지티드>는 감독 워쇼스키 형제가 지나치게 어려운 액션을 요구할 때 원화평이 대처하는 방식을 기록했다. “안 돼요. 와이어 당길 사람이 부족해”라고 원화평이 말하자, 통역을 통해 전해들은 형제 감독은 “그런가요? 그러면 우리가 당기지, 뭐”라고 대답한다. 그 다음 순간은 카메라 뒤로 사라지지만, 완성된 <매트릭스>의 어느 장면이 감독과 무술감독 모두에게 만족스러울 거라는 사실은,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원화평은 이처럼 대륙의 기질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무술인이다. 그는 지나친 낙관을 경계하면서도 그 낙관이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을 준비한다. 리안이 그에게 <와호장룡>을 제안했던 1997년, 그는 <매트릭스>를 촬영하고 있었다. “내 눈으로 <와호장룡>이 제작될 거라는 사실을 확인만 하면 그 영화를 할 수 있다”고 대답했던 그는 길어야 6개월 전에 영화촬영 준비를 시작하는 홍콩영화 시스템에 익숙해 있었다. 그는 1999년 개봉한 <매트릭스>가 그처럼 일찍 촬영을 한다는 사실조차 경이로웠다. 3년이나 먼저 액션을 고려하고 있던 리안에게 믿음이 갈 리 없었지만, <와호장룡>은 소년 시절 읽었던 무협지만 염두에 두고 있던 리안 혼자였다면 결코 가능할 리 없었던, 공기처럼 가벼운 무협영화로 완성됐다. 원화평은 사마귀처럼 잔인하고 새처럼 땅을 박차오르며 비단에도 강철 같은 힘을 싣는 쿵후를 연마한 장인이다. 그는 자신이 연마한 무술에 수많은 사람의 협공이 필요한 영화를 도입했다. “무예의 영혼을 잃지 않아야 하지만, 할리우드 배우들에게 그 정신을 요구할 순 없다”고 관용을 보이는 그는 쿵후와 영화 양쪽 모두의 달인일 것이다. 원화평은 누구보다 현실적이면서도 남루한 현실을 가뿐히 뛰어넘는 대륙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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