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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이의 전주 다이어리 [2]
김현정 2003-05-09

드레이어 감독님, 죄송합니다

전주 시내 한가운데 펼쳐진 `마당`의 전경. 매표소들과 안내데스크뿐 아니라 저녁 6시부터는 밴드들의 공연이 잔치의 흥을 돋우는 자리가 되기도 했다.

전주영화제 일반 상영작은 입장료가 5천원이지만, 심야상영과 음악을 연주하는 ‘소니마주’는 1만원이다. ID카드로 무료 티켓을 끊어 상영장 겸 연주회장에 들어가면서 유료관객에게 부끄럽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영화는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무성영화 <잔다르크의 수난>이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라고 알고 있는 <잔다르크의 수난>은 잔다르크의 짧은 생애 중에서 재판과 화형만을 뽑아낸 영화였다. 어마어마한 클로즈업이 쉬지 않고 나오는 이 영화에 멜로디를 넣을 부분이 마땅치 않았는지, 네명으로 이루어진 연주팀은 계속 붕붕거리거나 끼익거리기만 했다. 언제쯤 음악이 시작될까 궁금해하다가, 잠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긴 영화는 중간에 한번 자줘야 중요한 결말을 놓치지 않아”라고 위안삼던 평소와 달리, 이 나태한 태도를 후회하게 될 순간이 곧 찾아오게 된다. 바로 다음날에도 포기하지 않고 ‘소니마주’ 시간에 상영장을 찾았다. 마땅히 볼 영화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누군가 “<뱀파이어>는 70분밖에 안 돼. 설마 그걸 못 버티겠니”라고 격려해줬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엔 시작부터 달랐다. 뱀파이어와 전설을 연구하는 청년이 음산한 여관에 투숙하면서 무서운 일을 겪고,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헤매는 <뱀파이어>는 분명 환한 낮으로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그럼 편히 주무세요”, “새벽이 밝아야 할 텐데” 등의 대사로 헷갈리게 하는 것말고는 재미있는 영화였다. 무서운 장면이 자주 나왔기 때문에 음악도 정말 음악 같았다. 영화가 끝나고 나선 뱀파이어의 가슴에 말뚝을 박는, 피나 심장은 안 나오고 콩콩 때리는 손만 보이는 장면이 검열 때문에 삭제됐다는 교육적인 시간도 가졌다. 그러나 전날의 행태를 후회한 건 <뱀파이어> 때문만은 아니었다.

H 선배의 전화를 받고선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에 관한 거라면 뭐라도 보기로 마음먹고 다큐멘터리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나의 영화>를 보러 갔다. 혹시라도 그의 영화들이 왜 걸작이라는 걸까, 가르쳐줄지 모른다는 기대도 있기는 했다. 드레이어의 육성이 담긴 자료를 모으고, 그의 스탭과 배우들을 인터뷰한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는 십년에 영화 한편을 만들 정도로 전락하기도 했던 천재감독의 일생을, 가끔은 감동적인 순간도 포착하면서 재구성한다. 사람들이 회상하는 그는 완벽한 영화를 추구하면서 스탭들을 못살게 굴었고, 천진한 웃음과 사탕 하나로 입막음을 하던 감독이었다. 혹은 끈기있게 기다리면서 배우가 다시는 하지 못할 연기에 도달하도록 부추기는 감독이기도 했다. 다큐멘터리의 힘은 위대한 것이어서 드레이어의 다른 영화들이 보고 싶어질 정도였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잔다르크의 수난>의 주연 마리아 르네 팔코네티의 딸도 출연했다. 그녀는 어머니를 자랑스러워하면서도, 팔코네티가 <잔다르크의 수난> 이후 영화를 포기했다고 말했다. 너무 힘든 영화였다고. 팔코네티는 그뒤 파산했고 1956년 아무도 모르게 죽었다. 한 여자에게 더이상 이루고 싶은 것이 없도록 만든 영화를 보면서 졸았다니, 깊이 뉘우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나 더. 드레이어는 “영화를 보러 가서 한, 두주 동안 힘들었던 일상을 잊는 사람들도 있다. 예술영화만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단조로울까”라고 중얼거린다. 역시 거장은 달랐다.

작가의, 혹은 작가에 의한 다큐들

내가 손에 쥐고 다니는 티켓을 본 사람들은 묻곤 했다. “이 영화를 왜 보냐? 재밌냐?” 평소에는 “마음 붙이고 보면 괜찮다”고 대답했지만, 상영관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는 본심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키에슬로프스키 영화는 극영화도 안 보는데, 다큐멘터리를 보고 싶겠어요?” 고향이 전주라고는 하지만, 전주에서 살 때나 가끔 들르는 지금이나 날마다 길을 잃어버리는 나는, 그날도 셔틀버스 정류장 반대편에서 헤매고 다니느라 영화 시작 시간에 간신히 맞춰 뛰어들어갔던 것이다. 마지막 상영이라 나른했지만, 무심코 내뱉은 솔직한 대답과 고향에서 길도 못 찾는다는 자책과 허리를 곧추세울 수밖에 없는 좁고 낮은 의자가 겹쳐, 키에슬롭스키와는 또렷한 한 시간 반을 보낼 수 있었다.

전주에서 발견한 다큐멘터리 2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

<지금 아니면 아니 되오!> | 1996년 | 덴마크 | 욘 뱅 칼센

전화도 제대로 없는 아일랜드의 오지. 어느 중년남자가 한참 떨어져 있는 옆집을 향해 부지런히 걸어간다. “결혼을 해야 되지 않겠어? 어머니가 평생 너를 돌봐줄 순 없잖아.” 노총각 지미는 노총각 친구들에게 결혼을 권유하지만, 정작 결혼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다. 지미는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아침마다 새로 산 암소의 젖을 짜서 자신에게 갖다줄 참한 아내를 원한다. <지금 아니면 아니 되오!>는 마침내 중매쟁이에게 편지를 보낸 지미가 마음 설레면서 보내는 며칠을 픽션과 다큐멘터리를 섞어 담고 있다. 다큐멘터리보단 극영화 형식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지금 아니면 아니 되오!>가 다큐멘터리 부문에 포함된 건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이야기와 인물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카메라가 360도를 돌아보아도 사람 한명, 집 한채 보이지 않는 시골. 영어영화이면서도 영어자막이 필요할 정도로 사투리가 심한 노총각들은 제작연도를 의심하게 할 정도로 시대에 뒤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 지미는 데이트를 준비하면서 왈츠를 연습하고, 결혼조건 제1항으로 “젖을 잘 짜는 여인일 것”을 내세운다. 그러나 이 고리타분한 마을은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답다. 지미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를 부를 때는 어떤 소음도 그를 방해하지 않고, 녹색 위에 흰 물감을 덧칠한 것처럼 안개가 내려앉은 풀밭엔 들꽃이 피어 있다. 누구라도 살고 싶어할 이 마을엔 기이한 분방함도 있어, 지미는 “눈으로 보지만 않으면 상처도 안 받지. 여자한테 다른 남자가 생기는 건 자연의 이치야”라고 말하면서 아내의 외도를 용인하겠다는 의지를 비춘다. 지미처럼, <지금 아니면 아니 되오!>도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건강한 즐거움을 찾는 영화다.

전주에서 발견한 다큐멘터리 3

딸아, 내 말을 들어다오

<내 딸 없이는> | 2002년 | 핀란드 | 알렉시스 쿠로스, 카리 테르보

영화 <솔로몬의 딸>은 이란인 남편에게 감금당한 미국 여인이 여섯살난 딸과 함께 국경을 넘어 탈출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영화다. 그 여자 베티 마흐무디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고, 책과 영화 덕분에 많은 돈을 벌었으며, 명예문학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그렇게 16년이 흐르는 동안, 이란에 홀로 남은 아버지 마흐무디 박사는 한마디 변명도 할 수 없었고, 딸을 만날 수도 없었다. 갓난 딸이 보름달처럼 환해보여서 마흐탑(달빛)이라는 이름을 주었던 아버지. <내 딸 없이는>은 그 아버지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읽어내리는 다큐멘터리다. 딸이 눈사람을 만들었던 집에선 살 수가 없어 세를 내준 마흐무디는 어디에 사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딸에게 끊임없이 말을 붙인다. “우리가 서로 얼마나 좋아했는지 기억하니?” “아빠 무릎에 앉아서 놀았던거 생각나?” 그러나 간신히 찾아낸 마흐탑은 제작진이 전해준 아버지의 영상과 편지를 거부했다. 미국인이 아는 마흐무디 박사는 2주 동안만 이란에 머물자는 거짓말로 아내와 딸을 유괴한 폭군이며, 거침없이 아내를 때린 악당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마흐무디 박사와 그 미국인 친구는 오히려 베티가 거짓말을 했다고 증언한다. 그들은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었지만, 국제적인 여론을 장악한 미국은 발언의 기회주차 주지 않았다. 중립국인 핀란드에서 제작된 <내 딸 없이는>은 마흐무디의 비극이 미국의 정치적인 공작과 결부돼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딸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절박한 부정으로 돌아가 끝을 맺는다. 육십이 넘은 마흐무디는 마흐탑을 만날 때까지는 죽을 수도 없다고 했지만, 마흐탑은 아직도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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