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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촬영현장 스케치 [1]

“성(性)스럽고 성(聖)스러우니, 이 어찌 흥미롭지 않으리오”

배용준-전도연의 발칙한 사극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안동 촬영현장 스케치

안동=글 이성욱 lewook@hani.co.kr·사진 조석환 sky0105@hani.co.kr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지금까지 나온 사극 가운데 가장 발칙한 제목을 달고 기묘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 영화의 촬영장을 찾았을 때, 처음 마주친 것은 작은 ‘마찰’이었다.

“영화가 하회마을과 맞지 않으면 곤란해요. 내일까지 어떤 영화인지 적어서 제출해주세요.” 옛 풍경이 필요할 때마다 들이닥쳤을 무수한 카메라와의 승강이에 이골이 났을 안동 하회마을 관리사무소 직원들의 다그침이었다. 여기 화재라도 나면 큰일이다, 나무 한 그루 값이 최소 500만원인데 뭔가 보탬이 되면 좋겠다, 저기 대나무들은 누가 잘랐지…. 집주인의 허락을 받았다고, 대나무와 화단의 꽃들은 서울에서 가지고 온 거라고 제작부에서 고분고분 설명한다. 사극 제작현장이어서 그런가 시대를 거슬러간 듯한 장면부터 보게 되다니. 낯선 시간대가 뒤섞여 공존하는 듯한 이 풍경은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라는 이색 사극에 접근하기에 어떤 의미에서 그럴싸한 서두인지도 모른다.

#1-<정사>보다 도발적으로

전도연은 이날 촬영에서 실제 나비를 수없이 날려보내야 했다. 길조와 흉조를 동시에 보여주는 호랑나비를 잡았다가 놓아주는 장면이었는데, 번번이 나비가 제대로 날아오르지 못해 NG가 계속됐다. “전 컴퓨터그래픽으로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그러면 아무래도 사실감이 떨어진다며 일단 실제 나비로 하자고 그랬어요.” NG가 이어지면서 주변의 스탭들이 큼지막한 잠자리채를 들고 ‘단역’ 나비를 채집해 전도연에게 전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평화’가 회복된 뒤 비로소 촬영지를 롱숏으로 둘러보았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을 끼고 돌아가는 낙동강, 그 건너편에 부용대라 불리는, 병풍처럼 늘어선 절벽의 왼쪽 끄트머리에 옥연정사(玉淵精舍)가 멋진 자태로 앉아 있다. 하회마을 안내 팸플릿에는 “서애 유성룡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우고자 했던” 곳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땅은 거유(巨儒)가 구름 같은 문도(門徒)를 양성하기에는 비좁아 보이고 책으로 빠져들기에는 경치가 너무 유혹적이었다.

영화 속에서 이곳은 9년간 수절하며 열녀문까지 하사받은 정숙한 숙부인(전도연)이 ‘국가대표급 바람둥이’ 조원(배용준)의 조직적이고도 압박적인 구애를 피해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 장소다. 수를 놓고, 나비와 노닐며…. 이곳으로 조원이 찾아온다. 카메라는 숙부인의 정절이 최대위기를 맞는 순간을 담는 중이다.

“레디…, 액션!”을 외치는 사람은 조감독이었다. 이재용 감독은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나직이 “컷”만 지시할 뿐이다. 가끔 슬그머니 연기자에게 다가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것만 빼놓으면 도통 말이 없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궁금해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라는 한 스탭의 말 그대로다. 그래선지 카메라, 조명, 분장 등의 스탭 움직임도 조용하고 차분하다. 현장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연출력의 요체인 양 논해지던 시절은 적어도 이 사극의 현장에선 시대착오적이다.

“<정사> 촬영 때는 더 심해서 실어증에 가까울 정도였어요. 밤에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초조해서 그랬죠. 이거 지금 잘 가는 건가 모르겠어서. 촬영이 70% 정도 진행됐을 때, <접속>의 장윤현 감독이 놀러왔어요. ‘이제 감 다 잡았죠? 난 30%쯤 진도 나가니까 뭐가 뭔지 정리가 되던데’라는 말에 속으로 어찌나 놀랐던지.”

그러나 뭐가 뭔지 모르게 찍었다는 장편 데뷔작 <정사>는 정밀한 호흡조절과 잘 짜인 미장센이 미덕으로 꼽혔던 영화다. 비록 단편영화계의 전설인 <호모비디오쿠스> 시절과는 판이한 스타일과 소재를 선보였지만.

<정사> <순애보> 그리고 <스캔들…>로 이어지는 장편영화들은 이재용 감독의 취향과 스타일이라는 측면에서 모종의 일관성이 있다. <정사>에는 그때까지의 불륜영화와 선을 긋는 한 장면이 툭 튀어나온다. 기혼인 서현(이미숙)은 남편과 시댁 식구들이 제사를 지내는 동안 집을 빠져나가 동생의 약혼자 우인(이정재)과 숨가쁜 정사를 벌인다. <스캔들…>의 첫 장면도 그렇다. 조씨부인(이미숙)의 사당에서 엄숙한 제사가 치러지는 동안 별채에선 조원이 기생과 질펀하게 놀아난다. 콘티북을 슬쩍 엿봤더니, <정사> 때보다 훨씬 도발적으로 느껴질 만큼 교차편집시키고 있다. 또 조씨부인과 조원은 하필 사촌지간이다. 그들은 정절녀 숙부인과 조씨부인의 남편이 들일 소실 소옥을 놓고 게임을 벌인다. 조원이 두 여인네를 농락하는 데 성공하면 조씨부인의 몸을 그 상으로 받는다. 그들 사이가 예전부터 야릇한 관계이긴 했다.

그렇다고 <스캔들…>이 대단히 전복적인 작품은 아닐 것이다. 외국의 클래식한 영화들처럼 이야기로나 미술적으로나 현대물보다 더 세련되고 멋있는 시대극을 해보고 싶다는 게 출발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또 뭘까 하고 궁금해지는 건 이재용 감독의 장기가 치밀하게 계산한 위반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상업영화의 장르 안에 머물면서도 이제까지의 관습에 살짝 어깃장 놓는 걸 즐긴다. <순애보>가 특히 그랬다. 일견 밋밋하고 자잘한 일상 묘사 위주의 멜로영화인 것처럼 ‘평가절하’당했으나 뜯어볼수록 ‘변태적’이다. 변태적이라서 뭐 어쨌다는 게 아니라 그게 너무 일상성 안에 스며 있어 흥행코드로 작용하기 힘들 만큼 배치해놓는 솜씨가 놀랍다. 짝사랑하는 여인의 주민등록증 사진을 놓고 동사무소에서 자위하는 우인(이정재)이나 자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포르노사이트에서 옷을 벗는 아야(그것도 피천득 수필의 애틋한 주인공 아사코란 이름으로) 등 곳곳에서 증거를 발굴할 수 있다.

“전형적인 상업영화와 고독한 작가주의 사이의 어디쯤”이라고 스스로 자리매김하는 이재용 감독은 무관심할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행보를 걷고 있다. 그런데 이 역시 그의 연출이라면? <스캔들…>은 <정사> 끝낼 무렵 떠올린 작품이었으나 그때만해도 <쉬리>가 나오기 전이어서 큰 예산이 들어갈 영화는 엄두도 내기 힘들었다. 속으로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것부터 하고 <스캔들…>은 세 번째로 해야지 하고 맘먹었다고 하니 이제껏 모든 걸 그의 계산대로 진행해온 셈이다. 의아스럽게도 오랜 시간 뜸들인 작품을 창작도 아니고 200년도 더 묵은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소설 <위험한 관계>에서 끌어왔다. 게다가 스티븐 프리어즈(<위험한 관계>, 1988)나 밀로스 포먼(<발몽>, 1989) 등 쟁쟁한 감독들이 같은 원작을 두고 달려들었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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