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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평론가 8명이 추천하는 단편감독 8인 [8]
2003-05-09

추천자 : 허문영 편집장

믿을 수 없는 연기 연출, 섬세한 관찰력

<안다고 말하지 마라>의 송혜진 감독

영화의 열쇠는 결국 인물이며 연기라고 생각한다. 작가영화이건 장르영화이건 그것이 사람을 그리는 한, 프레임 속의 인물에 생기를 부여하는 일이야말로, 연출의 핵심이다. 멀쩡한 자연인에게 조작된 영혼을 주입하는, 혹은 분석적으로 포착되지 않는 아득한 생명력을 불어넣는 능력은 결코 하나의 기술이 아니다. 과장이라는 눈총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그건 신의 조력이거나 천부적 재능이다. 아니면 본능이다. 교과서에서 배울 수 있는 기술로 <생활의 발견>의 경수나 <공공의 적>의 강철중이 태어났다고 믿기 힘들다. 위대한 배우라고 해도 아무 감독이나 그에게서 위대한 연기를 끌어내진 못한다. 그건 불가해한 균형이다. 위대한 연기는 위대한 균형이며, 그 균형의 한축에 배우가 다른 축에 감독이 있다.

최근 1년간 내게 가장 인상적인 단편은 실험영화에 가까운 김주호의 <속눈썹>이었지만, 송혜진(1974년생)의 <안다고 말하지 마라>를 그래서 망설임 없이 추천한다. <안다고 말하지 마라>를 보고 충격과 쾌감을 동시에 느꼈다. 이건 단편으로선 아주 드물게 캐릭터영화였고, 연기의 영화였다. <안다고 말하지 마라>는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만큼 꾸밈새가 소박하다. 얼핏 보기엔 어떤 야심도 없는 습작처럼 느껴진다. 줄거리도 아주 단순하다. 추석 연휴, 고등학교 3학년인 사촌동생 장철이 수학 과외를 받기 위해 안동에서 서울로 올라온다. 장주는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장철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장철은 별로 알아듣는 눈치가 아니다. 닷새 뒤 장주는 장철을 보내고 돌아서다 왠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 된다.

‘안다고 말하지 마라’의 생략된 목적어는 사람이다. 구체적으로는 시골 고등학생 장철이다. 그렇다면, 이 단편의 제재는 소통과 불소통인가. 그렇게 말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 단편의 이야기는 어떤 메시지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게 아니다. 송혜진의 카메라는 인물을 관찰한다. 관찰하면서 질문한다. 이 인물은 누구일까? 우리는 그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인물은 내게 무엇일까? 감독이 피사체를 관찰한다는 건 생각보다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건 감독이 피사체를 조작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특히 상징과 알레고리에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단편에서, 조작하면서도 관찰한다고 느껴진다면 그건 이 어린 감독이 영화라는 매체를 매우 잘 알고 있다는 얘기다.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 이 인물을 관찰하다보면, 우리는 처음엔 매우 익숙해 보였지만 실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한 인간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짧은 시간에 촌스럽고 보수적이고 귀엽고 기발하고 수다스런 이 인물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없지만 그의 존재를 승복하고 그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그건 무엇보다 연기의 힘인 것 같다. 장철을 연기한 김도형은 믿을 수 없을만큼 자연스럽게 극중 캐릭터가 마치 자기 자신인 것처럼 연기한다. 그 과정이 너무 무심하게 진행되는 까닭에 나는 이 단편을 보면서 약간 속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연출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운 연기야말로 웬만한 장편에서도 만나기 힘든 영악한 연출이다. <안다고 말하지 마라>의 연기의 힘은 곧 연출의 힘이다.

송혜진은 몇 가지 아이디어로 영화를 찍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뭔가를 주장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뭔가를 알고 싶어서 조작하며 동시에 관찰한다. 그럼으로써, 대상을 풍부하게 만든다. 그의 장편이 정말 궁금한 이유도 이것이다. 하나 더 있다. <안다고 말하지 마라>는 또한 리드미컬한 편집의 영화이고, 유머의 영화이다. 그는 자신의 다양한 재능을, 별로 내세우지 않는 척하면서 곳곳에서 얄밉게 발휘하고 있다. 나는 그가 충분히 많은 사람과 소통하면서도, 자기의 영화를 찍을 줄 아는 감독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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