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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평론가 8명이 추천하는 단편감독 8인 [3]
2003-05-09

추천자 : 이용관 중앙대 교수

영상과 리듬으로 말하는 걸출한 재능

<스릴이 사라진 후에>의 염정석 감독

<희망이 없으면 불안도 없다>

‘이 감독의 장편영화를 꼭 보고 싶다’는 생각을 깊게 해온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20여년의 강단생활 동안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는 수많은 후배와 제자들의 장편영화를 어찌 기대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한 사람만을 추천하란다. 다시 많은 얼굴들을 떠올려본다. 그들 모두를 어찌 잊어버릴 수 있을까. 끝내 그리운 이름들 대부분을 나열한 상투적인 원고를 보냈다. 그랬더니 잡지사의 기획의도와 형평성에 어긋나니 괴롭더라도 다시 쓰라고 한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애초에 원고청탁에 응한 것이 잘못이었다. 그때는 막연히 10년 넘게 고생하고 있는 제자들을 모두 소개했으면 하는 헛된 욕심에 잔뜩 사로잡혀 있었다. 한결같이 재능이 출중한 재목들이었는데 어째서 불혹의 나이에 이르도록 장편 극영화로 데뷔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런 얘기들을 나누고 싶었다. 그런 자리를 통해 차라리 운명의 신에게 호소하면서 오늘밤에도 용기를 잃지 않고 시나리오를 쓰고 있을 그들 모두에게 나의 작은 소망을 전하고 싶었다.

그중에서도 먼저 염정석의 장편 극영화를 보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싶다. 그는 학생 시절에 이미 단편영화계가 놀랐을 만큼 걸출한 작품들을 연출했을 뿐만 아니라 16MM 장편영화를 통해서도 무서운 신인으로 평가받았다. 그리고 이후의 작품들도 발표될 때마다 남다른 주목을 받았으며 몇편의 장편 시나리오로 여러 기획자와 호의적인 관계도 맺었다. 그런데도 결국은 하나도 제작되지 않았다. 흥행성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스릴이 사라진 후에>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놀라움을 숨기지 않았다. 로드무비 형식이면서 누벨바그와 누벨 이마주의 경계에서 양자를 아우르는 영상표현이 인상적이었으며, 내러티브보다는 영상과 리듬으로 하여금 인물의 심리와 이야기 상황의 흐름을 이끌게 하는 감각이 빼어났다.

그의 작가적 개성은 이후의 단편들을 통해 반복적으로, 그러나 점차 압축적이면서 세련되게 확립된다. <땅 위에서도 하늘에서처럼>과 <광대버섯>이 그렇다. 특히 환상과 알레고리가 스타일을 통해 내러티브와 주제를 심화시키는 비범함이 돋보인다. 길거리의 청초한 여인과 병원의 피에로가 인물과 작가 모두의 내면풍경을 은유하는 곳에서 단편 영화계에서는 드물게 보는 영화작가의 탄생을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희망이 없으면 불만은 없다>에 이르면 실존적 자화상, 그중에서도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향해 끝없이 걷고 있는 새로운 실존을 시적으로 완성한다. 일자리를 찾는 젊은이가 어린 창녀와 밤을 지내고 아침을 맞이하는 곳에서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자신을 확인한다. 그의 작품들 중 가장 짧으면서도 완성도가 높은 이 단편은 진작에 발표했던 16mm 장편 <나쁜 시절>을 견인하면서 이제 독창적인 장편 극영화가 탄생할 것임을 기대하게 한다.

그가 쓴 몇편의 장편 시나리오도 그의 작가론의 연장선상에 있다. 다만 점점 더 상업성을 의식하고 있음을 본다. 과연 그는 그 길을 따라 자신의 꿈을 성취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그가 현실과 타협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분명 나는 그의 인생에 더는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으며, 그만큼 한없이 미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지만, 이 자리를 빌려서도 다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못난 선배이자 선생으로서 얼마나 진부하고 또 무기력한 말인 줄 알면서도 말이다.

나는 진정 어리석게도 그에게 그의 작품처럼 <희망이 없으면 불안도 없다>는 말을 거듭해서 해주고 싶다. 또는 15년 전부터 그에게 술잔에 담아 역설했던 것처럼 이영일 선생의 고언을 다시 들려주고 싶다. “(현실은) 초자연적 힘을 가진 악마다. 작가는 그 악마를 사로잡을 웅지와 방법론을 지녀야 한다.” 그에게뿐만 아니라 언제나 잊지 못하는 그리운 이름들에게도. 유상곤, 남상국, 문석민, 김대종….

그들의 시나리오를 들고 직접 기획자나 제작사로 뛰어다니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예술이 제작되고 상영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하면서 초라한 추천의 글을 마친다. 모쪼록 모두 건강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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