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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댑테이션>,찰리 카우프만 [3]

“ 그래 우린 아리영보다 못난 작가다, 어쩔래 ”

<품행제로>의 별난 쌍둥이 작가 이해준·이해영, 카우프만 형제와의 헐렁한 농담 3천 마디

몇달째인지 모른다. 데드라인이 넘어도 한참 넘었다. ‘제목을 아직 붙이지 않은 공포영화’ 시나리오를 붙잡고 있는 공포의 나날 동안 계절은 두번 바뀌었다. 그 사이, 우리를 제거하기 위해 회사가 은밀히 자객을 고용했다는 소문이 나돈다. 더이상 작업실은 안전한 곳이 못 된다. 급하게 짐을 챙겨 행선지를 알 수 없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긴장이 풀리자 서서히 눈이 감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버스가 다다른 곳은 경기도 고양시. 꽃박람회가 한창이다. 도피처치고는 너무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달리 갈 곳이 생각나지 않는다. 박람회장에는 샐비어도 있고 맨드라미도 있고 난초도 있었다. 그때, 난초를 감상하고 있는 낯익은 뒷모습이 보인다. 숱없는 곱슬머리에 뚱뚱한 몸집, 어정쩡한 포즈, 우린 그가 니콜라스 케이지를 닮기라도 한 찰리가 아닐까 싶어 수줍게 불러보았다.

해영: 익스큐즈미… 혹시 찰리?

사내: (돌아보며) 노, 아임 도널드.

해준: 도널드는… 혹시 찰리스 영거 브러더?

이때, 또 다른 사내 하나가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찰리: 아임 찰리.

해영: 아하, 찰리! 하우 아 유?

찰리: 파인 땡큐, 앤쥬?

해준: 파인 땡큐… 웰컴 투 고양… 앤드… 아이 라이크 무비… 앤드 아이 라이크 버네너….

찰리: 우리 그냥 말놓자.

해영: 어… 그… 그래… 쿨럭….

풀리지 않는 작업, 마침 카운슬러가 필요하던 차에 그것도 경기도 고양시 같은 곳에서 카우프만 형제를 만난다는 현실이 다소 개연성 부족이기도 하지만, 딱히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어쨌든 우리는 카우프만 형제를 만났다(아 글쎄, 만났다니까).

회포를 풀기 위해 우리가 옮겨간 곳은 일산의 한 찜질방. 평일 대낮이라 한산한 내부. 정중앙에 둘러앉은 우리는 맥반석 계란부터 까기 시작한다. 원체 허리가 부실하기 짝이 없는 도널드, 슬금슬금 기어가더니 저만치 드러누워 허리부터 지진다. 기다렸다는 듯, 찰리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진다.

찰리: (둘러보며) 꼭 도널드가 없어서 하는 말은 아닌데. 요즘 나 환장하겠어. 쟤 나 따라서 각본쓰잖아. 스릴러래. 범인-경찰-희생자든가 범인-경찰-애인이든가. 어쨌든 알고보니 세 사람이 한 사람이었대. 왜냐? 다중인격.

준: 저런저런… 쯧쯧…. 저질러놓고 수습 안 되면 죄다 다중인격이구먼.

해영: 어떻게 된 게 스릴러의 50%는 다중인격이고, 50%는 범인이 주인공이야?

찰리: 그니까! 게다가 그 자식, 요즘 로버트 맥기 강의까지 듣고 다닌다니까.

준: 시나리오가 무슨 공장에서 기계 찍듯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웬 맥기?

해영: 차라리 그 시간에 그 돈이면 여행이나 다녀오지.

찰리: … 만날 여자 꼬실 생각이나 하고. 얼굴도 나 같은 게….

세 사람, 잠시 침묵…

준: … 만날… 여잘 꼬셔…? …보니까 만날 놀던데… 파티도 자주 다니고… 그러면서 시나리오도 쓰고….

해영: 좋겠다.

찰리: 좋기는! 아무 생각이 없는 거지!

해영: 아무 생각없는 친구가 무슨 시나리오를 그렇게 빨리 써.

찰리: 빨리 쓰면 다야?

해준: …100만달러도 받는다며.

찰리: (끙…)

해준: 혹시… 우리는 지금 도널드를 부러워하는 게 아닐까? 할 거 다 하고, 놀 거 다 놀고. 한마디로 ‘생활’도 하면서 시나리오도 즐겁게 쓸 수 있다는 거. 그건 대단한 축복이잖아. 다른 일도 마찬가지겠지만 시나리오는 일 자체에 대한 강박이 특히 심한 것 같아. 시나리오에 생활을 저당잡힌다고나 할까.

해영: 공포영화 물고늘어지면서 농담 아니라 헛게 보이고 헛게 들려. 진도가 나갈수록 주변에 산재하고 있는 온갖 혼령들이 점차 실체화되는 느낌이랄까. ‘무서워서 못 쓰고 있다’고 하니까 회사에선 좋아하던데, 진짜로 무서워서 못 쓴다니까. 이러다 빙의될까 겁나.

해준: 어쨌건 쑥쑥 잘 써내면서 생활도 척척 잘하는 작가들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어. 생각해보니까 한국에도 그런 작가가 있네.

찰리: 누구?

해준: 아리영.

해영: 사실 아리영은 도널드처럼 생각없이 마냥 즐겁진 않아. <질투는 나의 힘>에서 편집장이 그러잖아, 작가는 영혼에 상처가 있어야 한다고. 아리영은, 보기엔 그래도 상처가 많아. 우리 같은 맹탕하고는 질적으로 달라.

해준: 근데, 시집가더니 요즘은 통 안 쓰대.

찰리: (뭐래는 거야…)

해준: <어댑테이션>은 잘 봤어. 어찌됐건 탈고했으니 부럽군. 당신 자신을 그렇게 완전히 까발리면서까지 이야기를 완성시켜야만 한다는 그 처절한 현실이 난 좀 슬프더라고. 오죽했으면 그런 발상까지 했겠어.

찰리: 사실 편법이지. 엄밀히 말하면 이건 <난초도둑>을 영화화한 건 아니잖아.

해영: 솔직히 이 이야기 자체가 그닥 유니크하진 않다고 봐. 당신 말마따나 이 영화 전체는 ‘걸어다니는 클리셰’ 같은 느낌이 있어. 이 영화는 분명 만듦새도 뛰어나고 배우들의 연기도 놀랍고… 게다가 충분히 흥미롭기까지 하지만 그렇다고 ‘독창성’이 전면에 대두될 작품은 사실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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