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읽기
고독한 늑대처럼, 얼음같이 미소짓다
2001-05-09

브레송을 완벽에 가깝게 복제한 영화 <성냥공장 소녀>

● “분명하고 정확한 어떤 것을 가지고서야 부주의한 눈과 귀의 주의를 끌 수 있을

것이다.” 영화만들기에 대한 단상들과 메모들, 그리고 때론 불가해한 듯한 인상마저 주는 미끌미끌한 아포리즘들을 모아놓은 로베르 브레송의

얇으면서도 미묘한 책 <시네마토그라프에 대한 노트>(1975)에서 저자의 심중 가장 깊숙한 곳에 놓여 있는 표현을 굳이 하나만

들라면 앞에서 인용한 문장쯤이 될 듯하다. 이 위대한 시네아스트가 실행한 중요한 영화적 방법론이란, 대략적으로 말해 ‘부주의한 눈과 귀의

주의를 끌도록’ 필수적인 것들만을 남겨놓고 그 나머지는 과감하게 가지를 쳐버리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브레송에게 영화의 구축은 주로 ‘소멸’ 내지는 ‘제거’의 방법론을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예컨대 브레송은 배우로부터 얼굴의 입체감과

풍부한 표정을 박탈했고 배우의 목소리에서는 목소리의 다양한 톤을 삭제해버렸다. 또한 그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로부터는 내적인 심리를, 영화의

이미지에서는 깊이감을, 사운드트랙에서는 불필요한 정서를 초래하는 음악을, 그리고 내러티브에서는 인위적인 드라마를 잘라내버렸다. 이런 쉽지

않은 길을 따라서 도달한 지점이 바로 브레송이 추구한 이른바 ‘순수영화’(pure cinema)였다.

브레송주의자, 순수영화의 길을 가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성냥공장 소녀>는 브레송이 개척했던 영화의 그 신천지를 스스로 꼭 재방문해보고야 말겠다고

작정한 어떤 이가 만든 것처럼 보이는 그런 영화다. 물론 브레송의 영화 영토는 카우리스마키말고도 다른 수많은 시네아스트들 역시 수시로 다녀간

곳이었다. 장 뤽 고다르, 장 마리 스트라우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서부터 짐 자무시, 할 하틀리, 차이밍량, 지아장커 등에 이르는 다수의

훌륭한 영화감독들이 브레송의 방법론을 통해 영화라는 것에 대해 다시 사고하고 영화만들기에 대해 재차 배웠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 ‘브레송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 대놓고 명백한 ‘브레송적인 영화’를 만든 이가 과연 있었던가? 아마도 그들은 대개 다 브레송의 영화를 탁월한

교본 내지는 수시로 돌아가야 할 준거점으로 삼기는 했을지언정 자신들을 위한 일종의 밑그림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반면 <성냥공장

소녀>의 카우리스마키는 브레송의 영화를 거의 내면화한 다음 그것을 정말이지 충실하게 재가공해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성냥공장

소녀>의 카우리스마키’는 가장 열렬한 ‘브레송주의자’라고 말해도 좋은 것일까?

우선 카우리스마키가 <성냥공장 소녀>라는 영화를 구축하는 방법론부터 살펴보면, 여기서 그는 전술(前述)한 브레송의 방법론을 거의

그대로 대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는 집 안이나 밖 그 어디서건 따뜻한 손길 한번 받지 못하는 소녀 이리스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영화는 분명 호의적이지 않은 환경에 처한 이방인 이리스의 처절한 ‘수난기’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영화의 비극적 주인공들이 흔히 가질 법한

슬픔의 ‘표정’이 제대로 새겨져 있질 않다. 표정과 표현, 그리고 어떤 의도가 ‘의도적으로’ 지워진 그녀는 ‘의도적으로’ 설명을 회피하는

인물이다. 마치 브레송의 ‘모델’처럼(브레송은 자기 영화에 비전문배우들을 기용해서는 이들로 하여금 정서적 비표현성을 보여주도록 혹독하게

훈련시켰는데, 그들을 가리켜 브레송은 ‘모델들’이라고 불렀다) 이리스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사정을 감춘 듯한 그녀의 무표정함 속에서

오히려 표정의 무한한 흔적을 읽어보라고 차근히 권유할 뿐이다. 그 이리스 앞에는 꽤 드라마틱한 몇몇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다. 아마도 처음

경험하는 게 분명한 듯한 섹스, 그로 인한 예기치 못한 임신, 그리고 고요하게 폭발하는 이리스의 절망 등이 그것들이다. 하지만 카메라는

이리스에게 유의미하다고 할 이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날 순간에는 항상 시선을 떨어뜨리고 만다. 어차피 두눈 부릅뜨고 주시한다고 해서 사정이

달라질 것도 없고 차라리 생략을 통해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편이 낫다고 브레송이 생각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밖에 디제시스 바깥에서

들려주는 ‘영화음악’을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 점 등도 확실히 브레송이 내린 지침을 잘 따른 결과로 볼 수 있다.

관찰할 때는, 설명도 분석도 없이

브레송의 영화를 ‘복제’하고자 하는 데 있어서 <성냥공장 소녀>는 이처럼 브레송의 일반적인 방법론(또는 우리가

일반화해서 받아들이고 있는 브레송 영화의 원칙들)만을 적용하는 수준에서 머물지만은 않는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영화를 만들 당시 카우리스마키에게는

확실히 브레송이 만든 어떤 개별 작품들이 참조해야 할 텍스트로 머릿속에 꼭 박혀 있었던 듯하다는 것이다. 브레송의 영화들을 어느 정도 본

사람들이라면 그 텍스트가 바로 <무셰트>(1967)와 <돈>(1983)임을 알아내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의 전반부까지, 그러니까 대략 이리스가 자신이 느낀 끝모를 절망감을 행동으로 직접 표현하기 바로 전까지, 이리스는 브레송의 영화에 나오는

열네살 난 소녀 무셰트의 자매라고 봐도 전혀 이상하지가 않다. 그렇다면 무셰트는 어떤 소녀였던가? 기본적으로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은

호의라는 단어를 전혀 듣지 못하는 듯하다. 그녀의 어머니는 병들어 죽어가고 있고 알코올중독에 빠진 아버지는 그녀를 상습적으로 학대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린 무셰트는 학교를 마치면 카페에서 일을 해야 하고 집에 돌아오면 또 집안 일을 처리해야 한다. 이리스가 처한 상황도

무셰트와 별 다를 바가 없다. 성냥갑 무리들이 무표정하게 지나가는 컨베이어벨트를 뚱하게 쳐다봐야만 하는 그녀는 집에 돌아와선 부모들에게

식탁을 차려줘야만 한다. 그렇게 꽉 막혀 있는 나날을 보내야 하는 무셰트와 이리스, 그들에겐 안타깝게도 한순간의 방심이나 출구도 허용되지

않는다. 공원에서 자동차를 타며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무셰트에게 돌아오는 건 아버지의 매뿐이고 모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 빨간색 드레스에

돈을 쓴 이리스는 부모로부터 “창녀 같으니!”라는 억울한 욕지거리를 들을 뿐이다.

<무셰트>의 본을 받아 <성냥공장 소녀>는 어떤 심리적 설명도 분석도 하지 않으면서 주인공 소녀의 영혼이 무너져 내려가는

과정을 들여다본다. 물론 그 귀결은 비극적인 파국이다. 어머니의 죽음이 견딜 수 없어서였는지 아니면 처녀성을 상실한 것이 치욕스럽다고 생각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우리는 무셰트가 모포를 뒤집어쓰고 연못에 떼굴떼굴 몸을 굴려 스스로 목숨을 버린 것을 알고 있다. 그의

아이를 밴 남자로부터 모질게 버림받고 또 가족들로부터도 쫓겨난 이리스도 무셰트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그녀도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을까?’라며

우리가 관성적으로 생각할 때쯤, 카우리스마키는 우리의 그런 기대를 무너뜨린다. 그것도 브레송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브레송을 인용하는

방식을 통해서. 즉 결정적인 순간에 이리스를 무셰트에서 브레송식 헨리(<헨리 연쇄살인자의 초상>의 주인공)라고 할 이봉으로 바꿔버림으로써

말이다. <성냥공장 소녀>의 후반부는 그래도 구원을 노래했던 <무셰트>에서 황량하고 암울한 브레송의 마지막 작품인

<돈>으로 이월해버린 것이다.

아무리 영화가 수난극에서 학살극으로 그 성격이 변해도 카우리스마키는 여전히 브레송의 방식을 따른다. <돈>에서 브레송은 도끼를

든 이봉의 손 자체는 보여주었지만 그가 살인을 저지르는 순간은 고의로 보여주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카우리스마키는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갈

쥐약이 든 컵은 보여주지만 사람들이 죽어가는 순간은 그냥 건너뛰어버린다. 아마도 브레송을 제대로 연구한 카우리스마키는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절대로 ‘학살의 포르노그래피’가 아님을 알았을 것이다. 우리의 시선에는 들어오지 않았던 한바탕의 ‘잔혹극’이 끝난 뒤 카메라는 그

당사자를 비춘다. 어떤 직접적인 설명도 없는 이 장면에서 우리는 이리스에게 생긴 미묘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게 된다. 그동안 성냥이란 작은

도구의 노예에 불과했던 그녀는 처음으로 성냥이 말 그대로 자기가 이용할 ‘도구’라는 것을 깨닫는다. 아마 평생 억눌려온 듯한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스스로 무언가를 ‘통제’하는 느낌을 가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약하나마 이리스가 갖게 된 일종의 자신감은, 음악과는 거의 무관한

이 ‘브레송적인 세계’에서 그녀가 직접 음악을 튼다는 그런 과감한 행위를 통해 최고조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리스의 그 통제력은

지속성을 갖지 못한다. 영화를 그렇게 끝냄으로써 카우리스마키는 브레송의 ‘부정성’을 반복한다.

<무셰트>에서 시작해서 <돈>으로 끝나다

이처럼 철저히 브레송에 의지해 만들어진 듯한 영화인 <성냥공장 소녀>는 분명 아주 희귀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완벽에 가까운

‘복제’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복제’를 통해 이만한 수작을 만들어내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냉정히 평가하건대

<성냥공장 소녀>는 아쉽게도 앞선 시대의 위대한 대가의 경지를 훌쩍 뛰어넘기엔 힘이 부친 듯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가 참조한 브레송의 영화들, 즉 <무셰트>와 <돈>에는 각각 무셰트의 수난과 관련한 복잡미묘함과 이봉의 폭력과

관련한 복합적인 깊이가 있었다. 무셰트의 이야기에는 죄와 구원, 질투 등의 문제가 묘하게 엮여 있었고, 이봉의 이야기에는 돈과 폭력, 악의

순환이 얽혀 있었던 것이다. 반면 이리스를 둘러싼 절망의 풍경들은 전적으로 브레송의 세계를 빌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단순한 편이다.

이를테면 영화는 브레송식으로 설명을 하려 하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다 알 수 있다. 왜 그녀가 그리 황폐한지, 또 왜 그녀가 그렇게 바뀌어야

하는지 등을. 카우리스마키 자신이 말한 대로 브레송은 정말이지 친화하기가 힘든 ‘고독한 늑대’였던 것 같다.

홍성남|영화평론가